문둥병자(한센씨 병 Hansen disease)와 예수님
문둥병(혹은 나병)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죄의 결과를 상징하는 질병으로서, 그 환자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생활을 박탈당한 채 그들의 공동체 밖으로 소외되었다. 한편 성경에서의 문둥병이라는 말은 문둥병(leprocy)을 비롯한 광범위한 유형의 심한 피부병을 지칭하는 병명으로 쓰였다. 이는 흔히 의학 용어로 한센씨 병(Hansen disease)이라 일컬어지는 나병에만 국한되는 용어가 아니라 피부와 모발의 이상 등에도 사용되던 피부 질환까지도 포함한 말이다. 그런데 어떤 종류의 피부병이든간에 그것이 일단 문둥병으로 단정지어지면 그 사람은 이후부터 매우 고통스러운 생활을 해야만 한다. 율법에는 "문둥 환자는 옷을 찢고 머리를 풀며 윗입술을 가리우고 외치기를 부정하다 부정하다 할 것이요 병 있는 날 동안은 늘 부정할 것이라 그가 부정한즉 혼자 살되 진밖에서 살지니라"(레 13:45, 46)고 규정하여 육체적 고통과 함께 대사회적 고통까지 함께 받아야만 했던 무서운 질병이다.
레 13:45-46/ 문둥 환자는 옷을 찢고 머리를 풀며 윗입술을 가리우고 외치기를 부정하다 부정하다 할 것이요 병 있는 날 동안은 늘 부정할 것이라 그가 부정한즉 혼자 살되 진 밖에 살찌니라
예수님은 부정하고 저주받은 자의 대명사였던 문둥병자와 깉은 자들에게 구원의 소식이었다. 하나님의 나라는 단지 외식이나 율법의 형식적인
율법에 행위에 의해서 주어지는 상급이 아닌 은혜로 주어지는 것임을 알게 해준다. 그 은혜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에 대한 믿음을 통로로 주어지며 그 믿음 또한 은혜의 산물임을 알 수 있다. 문둥병은 율법에 의하면 사회 활동이나 대인 접촉이 금지된 천절과 같은 질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한 문둥병자는 율법의 고리를 깨치고 예수께 나아왔다. 실로 이것이야말로 생명의 주께 나아오는 자의 담대한 모습이다. 그런데 그는 예수께 나아가 그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겸손과 예의를 갖추고 ('끓어 엎드리어')예수께 경배했다. 이에 대해 누가는 '엎드려'(눅 5:12)라고 했으며, 마태는 '절하고'(마 8:2)라고 각각 묘사했으나 그 의미하는 바는 동일한 것이다. 진정 그는 절박한 심정으로 마치 자신의 전부를 예수께 드리기라도 하듯이 겸손한 몸가짐으로 경의(敬意)를 표했던 것이다(시10:17;약 4:6).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막 1:40)
문둥병자는 예수께서는 자기를 능히 고칠 수 있다고 확신했다. 다만 그가 걱정하는 바는 예수께서 과연 자기의 치유를 원하시는가 하는 것이다. 실로 그 문둥병자의 예수께 대한 신앙 지식(전지 전능하신 분으로서 무엇이든 원하시기만 한다면 모든 것이 가능하시다는 사실)을 가히 초월적이리만큼 놀라왔다. 주께 모두 맡기는 것이야말로 간구자의 참된 자세일 것이다. 한편 그 문둥병자는 예수께 '고침'을 바라기보다 '깨꿋케 됨'을 바랐는데, 이는 하나님의 거룩한 선민으로 자부하고 있던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이 문둥병은 의학상의 문제이기 이전에 의식법상의 문제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레 13:1-3).
레 13:1-3/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일러 가라사대 사람의 피부에 무엇이 돋거나 딱지가 앉거나 색점이 생겨서 그 피부에 문둥병 같이 되거든 곧 제사장 아론에게나 그 자손중 한 제사장에게로 데리고 갈 것이요 제사장은 그 피부의 병을 진찰할찌니 환처의 털이 희어졌고 환처가 피부보다 우묵하여졌으면 이는 문둥병의 환처라 제사장이 진단하여 그를 부정하다 할 것이요
예수님께서 문둥병자를 "민망히 여기사(스플랑크니조마이; σπλαγχνισθε; filled with compassion,NIV)" 그에게 은혜를 베푸셨다고 성경은 증언한다. 그 문둥병자가 깨끗하게 될 수밖에 없었던 근본 동인(動因)이 묘사되고 있는 것이다. 이 말의 본래의 의미는 '간절히 열망하다'를 뜻한다. 이것은 예수의 문둥병자를 향하신 긍휼과 사랑과 동정심을 동시에 나타내는 말이다. 이는 곧 그가 받는 모든 고통을 목격하고 더불어 그 고통에 동참할 뿐 아니라 그 고통을 치유해 주고자 하시는 마음이 간절하다는 의미를 내포한 말일 것이다(히 4:15). 한편 본문의 '민망히 여기사'라는 독법(讀法)을 일부 사본들에서는 '분하게 여기사'라는 의미의 '오르기스데이스'로 읽기도 한다. 이러한 변용에 대해 혹자(W. W. Wessel)는 주께서 분을 내신다는 말을 쓰는 것에 당혹감을 느낀 서기관에 의해 '오르기스데이스' 독법 대신에 '스플랑크니조마이'라는 독법을 취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만일 '오르기스데이스'독법을 취하게 된다해도 그 더러운 병이 마귀의 것이라는 사실이 예수로하여금 분하게 여기도록 만들었다는 설명으로 이에 대한 답변을 삼을 수 있다. 즉 예수의 분냄은 병자나 그가 앓고 있는 병을 겨냥한 것이 아니라 그를 파멸로 이끈 사단에게 겨냥한 것이었다. 이렇게 본다면 예수와 사단은 또 한번의 충돌을 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마가의 복음서가 관심을 기울이는 한 가지 사안이다. 그러나 비록 '오르기스데이스' 독법을 취한다하더라도 그 병자에 대한 예수의 뜨거운연민의 정은 참으로 감동적인 것이었다.
예수님은 그를 민망히 여기셔서 그에게 직접 "손을 내밀어" 고쳐주셨다.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시며 그 말씀이신 하나님의 아들께서 말씀만으로도 그를 능히 고치실 수 있으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는 부정한 문둥병자에게 손을 내밀어 그의 몸을 만지셨는데, 이는 모세법에 근거해 볼 때 부정을 자초(自招)하는 일이었다(레 13:45, 46).
레 13:45-46/ 문둥 환자는 옷을 찢고 머리를 풀며 윗입술을 가리우고 외치기를 부정하다 부정하다 할 것이요 병 있는 날 동안은 늘 부정할 것이라 그가 부정한즉 혼자 살되 진 밖에 살찌니라
사실 유대인들은 문둥병 환자가 집 안에 들어서는 경우 그 집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이 부정함을 입는 것으로 간주(看做)할 만큼 의식법에 철저했었다. 그러므로 예수의 이 행위는 초월한 사랑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진정 예수는 인류 구속의 메시지를 단지 입으로서만이 아니라 행동으로도 보이시고, 인간들에게 내재해 있는 두려움과 그릇된 관념을 실현해 보이셨다. 실로 그분의 사랑의 손길은 의식법의 부정이 지닌 힘보다 더 강하고 탁월한 것이었다. 한편 복음서의 많은 구절들에서 예수께서 병자들에게 친히 그 손을 대시며 병을 고쳐주셨던 사실이 나타나 있다(마 8:3,15;9:29;17:7;20:34;눅 5:13;7:14;22:51 등). 그리고 때로는 병자들이 예수 그리스도께 손을 대기도 하였다(3:10;5:27-31;6:56). 이처럼 어느 편에서 손을 대었든지간에 모두 병이 낳았다. 즉 분명히 그와 같은 신체적인 접촉으로 인하여 치료의 능력이 구주에게서 나와서 그 능력을 필요로 하는 자에게 전하여졌던 것이다(5:30;눅 8:46). 그러나 이것은 결코 어떤 마술이 아니었다. 또한 그치료의 능력은 결코 주님의 손가락이나 옷자락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그 능력은 참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참 인간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전능하신 의지와 죄인을 불쌍히 여기시는 무한한 사랑의 마음에서 나온 것이었다. 주님께서 예나 지금이나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신'(히 4:15) 그 손으로 병자를 만지실 때 치료의 능력은 발하여지는 것이다. 본문에서 분명히 밝히고 있는 바와 같이 예수께서는 '민망히 여기사' 그 손을 내밀어 문둥병자에게 대셨다. 이 불쌍한 병자의 간절한 소원과 믿음은 즉시 그를 간절한 마음으로 돕고자 하시는 구주로부터 응답을 받았다. 이처럼 신속한 응답은 주님의 의지와 능력과 사랑이 하나로 뭉쳐진 결과로 이뤄진 것이었다.
"가라사대 삼가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가서 네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고 네 깨끗케 됨을 인하여 모세의 명한 것을 드려 저희에게 증거하라 하셨더니"(막 1:44 )
"네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고"
문둥병자에서 고침받은 이 사람이 먼저 해야 할 일은 깨끗케 된 것을 보임으로 정결 의식을 행하고 그 깨끗케 됨을 제사장에 의해 공식적으로 선포받아야 했다(레 14:1-20). 그런데 여기 정결 판정을 내리는 제사장은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제사장 그룹에서 가장 우두머리격의 제사장이었을 것이다. 예수께서 이처럼 형식적이나마 정결 선포 권한을 제사장이 가졌다고 인정하신 것은 지금껏 진행되었던 율법 제사의 유효성을 인정하신 것이 된다. 그와 더불어 그 제사장으로 하여금 그 문둥병이 율법의 교훈에 따라 치유된 것이 아니라 율법의 완성자이신 예수의 사랑과 능력에 찬 역사(役事)로 이뤄진 것임을 분명히 인식시키기 위한 것이 되기도 한다.
"모세의 명한 것을 드려"
문둥병을 치료받은 자에게 요구되는 모세의 명령(레 13,14장)은 (1)제사장에게 판정을 받고(레 13:16,17), (2)산 새 두마리(two clean living birds)와 백향목과 홍색실과 우슬초를 드리고(레 14:4), (3)8일후 재차 흠없는 어린 수양 둘과 암양 하나를 드리는 것(레 14:10)으로 이뤄진다. 이처럼 예수는 모세의 명한것, 즉 율법을 무시하지 않으셨다. 그리고 예수의 이러한 조언을 완수하고서야 비로소 문둥병자였던 그 사람은 법적으로 회복되어 자유인이 되고 성전 예배 등이 가능한 종교적 사면을 받게 될 것이다. 이로써 예수는 율법과 선지자를 폐하려 오신 것이 아니고 완전케 하실려고 오신것임이 명백하에 입증되었다(마 5:17). 저희에게 증거하라 - 모세의 명령한 것을 드리는 것은 결국 '증거를 위한' 것이었다. 즉 제사장과 사람들에게 병고친 사실에 대한 확실한 증거로 그 명한 것을 행해야 했던 것이다. 실로 당시 백성들에게 이스라엘 종교의 책임자인 제사장의 치유 판결보다 더욱 확정적인 판정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