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는 베니아인이라 언급되었다. 지중해 연안 동부에 있는 지역(지금의 레바논)과 그 곳에 사는 거주자들을 말한다. 구약에서 히브리인들은 이 지역을 '가나안'이라 불렀는데(사 23;11), 실제로는 두로와 시돈 같은 주요 성읍들을 가리킨다. 고대의 역사가 헤로도투스는 그들이 페르시아 만에서 왔다고 말하기는 했지만, 해상 여행을 하는 페니키아인들의 역사는 분명하지 않다. 페니키아인은 BC 18세기에 방어에 유리한 지중해 연안 동족의 자연 항구에 정착했다. 그들은 해양족(블레셋 사람)의 연안 으로 좀더 내려가서 정착할 때까지 애굽의 지배하에 있었다. 이 때부터 두로는 페니키아의 주요 항구가 되었다. 다윗과 솔로몬은 두로 왕 하람과 상업상의 관계를 맺었으며(삼하 5;11; 왕상 5:1이하), 하람은 또한 배와 선원을 빌려 주기도 했다(왕상 9:26,27). 하람의 계승자 엣바알은 딸 이사벧을 이스라엘 왕 아합의 아내로 주었다(왕상 16:31). 그로 말미암아 페니키아인들의 우상 숭배가 이스라엘에서 증가하게 되었다(왕상 1`8:19).
"우리 중에는 시돈 사람처럼 벌목을 잘 하는 자가 없나이다"(왕상 5:6)
벌목(伐木)에는 단순히 나무 자르는 기술 뿐만 아니라 쓸만한 나무를 골라 적절한 시기에 자르고, 또 이를 적절히 보관하는 등 보다 광범위한 지식이 요구된다(Keil). 그런데 시돈 사람(the Sidonians) 곧 베니게인들 중에는 그러한 건축 기술자들이 많았다. 왜냐하면 베니게인들은 무역 중심의 생활을 해왔던 관계로 예전부터 선박 건조 기술이 발달했기 때문이다(Movers,Schnaase). 이에 반해 이스라엘은 농경 . 목축 생활을 해왔으므로, 목재를 사용하는 건축 기술이 부족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한편, 여기서 '시돈 사람' (치도님)이란 명칭은 곧 베니게(페니키아) 사람들을 총칭하는 말이다. 본래 베니게는 도시 국가 형태로서, 곧 시돈과 두로의 두 주요 도시로 구성된 국가이다. 그런데 예전에는 두로보다 시돈이 보다 중요한 도시로 여겨졌기 때문에 주변 국가들이 베니게인들을 속칭 '시돈 사람'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특별히 여기서는 백향목이 있는 지역이 시돈 지역에 속했고, 또한 시돈 성의 주민들이 보다 뛰어난 건축 기술을 갖추고 있었으므로 이처럼 시돈 사람이라고 부른 것이다. 그러나 이 지역 역시 두로 왕 히람의 통치 영역에 속했다(Keil, Hammond).
앗수르인들은 페니키아 연안에 압력을 가했다. 앗수르나시르팔 2세(BC 884-859년)는 두로, 시돈 및 다른 페니키아 성읍들에서 조공을 받았으며, 다음 세기 중반경 이러한 성읍들은 앗수르에게 예속되었다. BC 7세기에 페니키아는 앗수르의 속주(屬州)가 되었다. 그리고 그 후 바벧론 제국과 페르시아 시대에는 자치권을 회복했다(참고. 민13;16). 알렉산더 대왕은 두로에 이르는 길을 뚫어 점령하였으나, 그 곳은 다시 회복되어 신약 시대에는 시돈과 함께 번영을 누렸다(참고. 마 15;21). 이 지역의 거주자들은 수로보니게 족속이라 불렸다(막 7:26). 박해를
피하여 도망가던 초기의 그리스도인들에게 페니키아는 좋은 피난처였다(행 11:19).
후대의 선지자들과 마찬가지로(사 65:11에 그 곳의우상 숭배 관습이 언급되어 있다). 엘리야는 페니키아인들의 우상 숭배를 비난했다(왕상 18-19장). 그들의 다신적 종교는 멜렉이라고도 불리는 바알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페니키아의 예술에는무역을 통해 흘러 들어온 셈, 이집트, 호리 족속의 요소가 섞여 있다. 페니키아인들은 비단과 아마포와 모직을 염색하고 직조하였으며, 수를 놓아 수출하는 지역도 있었다. 페니키아는 또한 레바논 목재를 수출했으며, 그 곳의 장인들은 돌.상아.유리. 귀중한 금속품을 다루는 데 능숙했다. 그들은 무역을 하기 위한 문자와, 계산을 하기 위한 주판, 그리고 파피루스 책들을 발전시켰다. 불행하게도 그들의 문학과 신화가 거의 남아 있지 않지만, 그들의 글을 통하여 동쪽의 많은 학문들이 그리스로 들어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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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니키아(베니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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