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피루스는 큰 수생 식물의 이름인데 주로 종이처럼 글을 쓸 때 사용되었다. 고대에는 이집트 전역의 습지와 호수에서 자랐지만(참고. 욥 8:11), 오늘날에는 수단의 북쪽 어느 곳에서도 찾아보기가 힘들다. 3-6m까지 자라며 끝에는 종 모양의 아름다운 꽃이 핀다. 이것은 갈대 배와 바구니(출 2:3; 사 18:2), 샌들, 올, 밧주을 만들 때 사용되었으며, 그 뿌리는 가난한 사람들의 음식이 되기도 했다. 종이를 만들려면, 안쪽의 줄기를 길고 가늘게 잘라 판자 위에 놓고 그 위의 다른 줄기를 가로질러 놓는다. 그리고 이것을 나무 망치로 두들겨 밀착시킨다. 이렇게 약간 흰식의 종이가 만들어지면 끝과 끝을 연결하여 파피루스 두루마리를 만든다. 보통파피루스 두루마리는 20장의 종이가 연결된 것인데, 가장 긴 것은 대영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이집트의 파피루스 하리스 1세(Papyrus Harris 1, BC 1160년경, 길이는 약 4m)이다. 처음에는 보통 겉면(오른쪽 면)만 사용했다. 그러나 때때로 반대쪽(왼쪽면)만 사용했다. 그러나 때때로 반대쪽(왼쪽 면)도 사용했으며, 한 번 사용한 것을 물로 씻어 다시 사용하기도 했다.
오스트라카(Ostraca)는 원래 '빻은 굴 껍질'이라는 의미의 헬라어이다. 하지만 이것은 투표할 때 쓰는 도기 조각을 가리키는 말로 바뀌었다.
이것은 고대에 대단히 널리 쓰였는 데, 그 이유는 중요한 것을 기록할 수 없다는 한계가 있기는 하지만 값이 싸고 글씨를 쉽게 쓸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 위에 잉크로 쓰거나 겉을 긁어서 글씨를 썼다.
이집트 파피루스와 오스트리카.
파피루스는 BC 3000년부터 AD 600년까지 사용되었다. 면이 넓은 것은 BC 2000년부터 만들어졌는데, BC1000년 이전에는 시리아-팔레스틴으로 수출되었다. 오스트라카는 대부븐 BC1550년부터 BC 1070년(신왕조)까지 사용되었고 대다수가 이집트으 테베 주위에서 발견되었다.
이러한 것들은 메모철, 메모장, 종이 조각에 해당하는 것으로 근무 당번표, 계산서, 청구서, 편지 등 일상 생활의 모든 면을 보여 준다.
히브리, 아람, 헬라 파피루스와 오스트라카.
가장 오래된 히브리 파피루스는 BC8-7세기의 것으로 사해에서 발견되었다. 쿰란에서 발견된 이 사해 사본은 대부분이 양피지였지만 파피루스로 된 것도 있었다. 어떤 파피루스에는 구약이 적혀 있었다. 대부분의 중요한 히브리 오스트라카는 사마리아에서 발견되었는데, BC 9-8세기경의 것으로 기름과 술에 대한 청구서였다. 이러한 것들은 그 당시의 행정 체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라기스에서 발견된 것들은 BC 587년의 것으로 추저되는데, 그 내용은 바벨론이 도시들을 침략할 때의 유다의 절망적인 상황에 관한 것이다.
대부분의 가치 있는 아람 파피루스는 이집트의 엘레판틴에서 발견되었다. 그것들은 BC 5세기경에 유대인들이 기록한 것으로 법적인 문서와 편지들을 포함하고 있다. 이러한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성전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하나님의 이름을 가나안 신들의 이름과 합성시켰다. 헬라의 구약 파피루스는 비록 일부분이긴 하지만 아직도 많이 남아있다. 예컨대 BC 2세기경의 것으로 추정되는 신23-28장을 담고 있는것도 있다. 쿰란에서 바견된 사본들 중에도 헬라어로 된 구약이 있었으며, 대부분 BC 1세기경의 것이다. 체스터 베티 파피루스에는 구약의 여러 책들이 기록되어 있는데 AD 2-4세기의 것이다.
신약과 관계된 파피루스와 오스트라카.
신약의 일부와 또 다른 헬라 문서가 19세기 후반에 이집트에서 발견되었다. 이것들은 신약 연국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는데, 적어도 신약의 기자들이 사용한 그 당시의 헬라어를 밝히는 자료가 되었다. 예컨대 엡 1:14에서 '진지한(AV)으로 번역된 단어 '아르하본'은 RSV에서는 '보증'으로 번역되었다. 왜냐하면 이 단어는 그 당시에 어떤 재제 규약에서 보증으로 사용되던 단어이기 때문이다. 이는 신약에서 사용되던 단어가 일반적으로도 사용되었다는 것을 알려 준다. 분명히 신약에서 새롭게 만들어진 단어들의 대부분이 일반화되었고, 오늘날은 약 50개의 단어만이-전체의 1퍼센트-신약 특유의 단어라고 믿어진다. 신약의 문서에, 헬라어에 영향을 끼친 히브리어와 아람어 단어가 포함되어 있다 할지라도, 그 언어는 여전히 이집트 파피루스의 것과 대단히 유사하다. 또한 이집트에서 발견된 것들은 그 곳의 그리스도인들이 로마 세계의 사람들보다 훨씬 더 일찍 사본(책처럼 접혀 있는 파피루스 종이)을 발전시켰다는 것을 밝혀 주는데, 파피루스 사본들은 그 곳에서도 AD 3세기까지는 두루마리로 교체되지 않았다. 한 권의 사본에 복음서, 사도행전, 바울 서신들 등 성경 원문의 보존과 전승에 관한 중요한 사항들이 포함되어 있다. 파피루스 뭉치에는 종종 성경 연구에 필요한 학적인 명칭을 붙였다. 그 중 가장 중요한 것들은 시내 사본과 바티칸 사본과 체스터 배티 파피루스이다. 다른 라피루스들은 숫자로 언급되기도 한다(P4, P37등).
시내 산 사본과 바티칸 사본은 19세기에 발견되었는데 신약 원문 연구의 실제적인 진보를 가능케 해주었다. 웨스트곳과 홀트는 1881년에 개정된 신약 헬라어 원문을 출판했는데, 이것은 RV에 집중적으로 사용되었다.
"요한복음의 존리랜드 단편" 같은 어떤 파피루스는 학자들이 AD 2세기 초, 즉 한 시대에 이루어진 신약의 마지막 저작이라고 본다. 분명히 서기관들과 교육을 많이 받지 못한 그리스도인들이 원문의 필사를 맡았을 것이다. 그리고 초기의 많은 파피루스들은 박해 시기에 손실되었음이 분명하다.
신약이 실려 있는 몇몇 오스트라카가 발견되었지만(예. 막 9장과 눅 22장의 몇몇구절), 대부분은 신약 시대 후기의 것으로 편지, 계약서, 세금 영수증이다.하지만 이러한 상황에서도 몇몇 언어적인 발견들이 이루어졌다. 이를테면 '이름으로'라는 구절은 어떤 권위 아래 행해졌다는 의미의 공식적인 법률 용어임이 밝혀졌다.
또한 묵시록 중에 어떤 부분이 파피루스에서 발견되었는데, 이것은 학자들이 신악저술의 형태와 내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예컨대 나그함마디 부근에서 발견된 도마 복음서는 영지주의가 공관복음과 요한복음 그리고 다른 전승에 영향을 끼쳤다는 것을 알려 주는 중요한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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