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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의 찬가

by 소소한행복^^ 2022. 12.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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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장 46-55절까지는 '마리아의 찬가'라고 이미 알려져 있다. 이는 '매그니피캣'(Magnificat)이라고 불리우기도 하는데 그 이유는 라틴어역 성경에서 이 시의 앞 부분 첫단어로서 이 말이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이 시는 삼상 2:1-10의 한나의 기도를 떠 올리게 한다.

☆ 한나의 찬가/ https://mybiblenotes.tistory.com/m/747

한나의 찬가

한나의 기도는 '내 마음니...'(삼무엘상 2장 1절)부터 '...뿔을 높이시리로다'(10절)까지 이어진다. 진정 '마음이 슬픈 여자'(1:15)의 기도를 기억하사 아들을 허락하신 여호와께 자기 아들을 영영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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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플루머(Plummer)는 이 시를 한나의 시와 그 외에 다른 12개의 구약성경 구절들과 서로 비교하고 있다.


"마리아가 가로되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눅 1:46)

"찬양하며(μεγαλύνω 메갈뤼네이)" - '위대하게 만들다', '찬양하다'라는 뜻으로, 원문에서는 문장 제일 서두에 놓인다. 몇몇 학자들은 이 노래에 대해 본문 비평학상이나 문맥상의 이유로 마리아가 부른 노래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더러는 라틴어 사본의 이 부분이 엘리사벳의 노래로 되어 있어 이를 엘리사벳의 노래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삼상 2장에 나타난 한나의 상황과 자식이 없어 사회적으로 수치를 당하던 엘리사벳의 상황이 유사하며, 노래를 지은 사람의 처지와 48절의 내용이 유사한 것으로 보아 엘리사벳이 저자일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들은 타당성이 없다. 한나와 엘리사벳의 처한 상황이 서로 유사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48절의 말씀은 마리아에게도 역시 적합한 말씀이다.

"그 계집종의 비천함을 돌아 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눅 1:48)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눅 1:47)

"하나님 내 구주" - 마리아는 하나님의 구원을 노래함으로써 자신의 노래를 시작하고 있다. 이는, 시련을 당함에도 불구하고 구주이신 하나님 안에서 기뻐하리라고 고백했던 하박국 선지자의 노래에 비교될 수 있다(합 3:18). 로마 카톨릭에서는 마리아가 예수를 잉태하던 그 순간부터 원죄(Original Sin)의 모든 영향에서 벗어났다고 말한다. 하지만 본문을 통해 분명히 드러나듯이 마리아 또한 하나님의 구원을 절실히 요청할 수 밖에 없는 죄인일 따름이다.

"그 계집종의...돌아보셨음이라"(48절) -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노래한 후 마리아는 하나님앞에 선 자신의 초라하고 보잘것없는 모습에 대해 겸허한 태도를 표명하였다. 여기 '계집종의 비천함'이라는 표현은 실제로 목수의 아내라는 낮은 사회적 신분에 대한 인식과 겸손에서 나온 고백이다. 마리아는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총을 입을 만한 별다른 조건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메시야의 모친이라는 칭호를 받게 된데 대한 감격과 겸손을 표시하였다. 하나님의 은혜는 언제나 심령이 겸손한 자에게 임하시는 것이다(사 57:15).

"지존무상하며 영원히 거하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자가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거하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거하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성케 하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성케 하려 함이라"(사 57:15)



"보라 이제...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48절) - 마리아는 엘리사벳을 통하여 '복이 있다'는 소리를 이미 들었다(42절). 그리고 후에도 한 여인에게서 '복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11:27). 또한 마리아는 성도들을 통해 대대로 복있는 여인으로 칭송받게 될 것이며 그리스도의 복음이 살아있는 한 그녀의 영광은 지속될 것이다. 여기서 주의 할 것은 이 구절의 의미가 로마 카톨릭의 마리아 숭배와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마리아가 비천한 여인임에도 불구하고 메시야의 모친이 되게 하신 하나님을 찬양해야 하며, 따라서 마리아에게 소원을 간구하고 축복을 부탁하는 행위는 잘못된 것임을 알아야 한다.


"능하신 이가 큰 일을 내게 행하셨으니 그 이름이 거룩하시며"(눅 1:49)

능하신 이(호 뒤나토스) - '능하신 이'는 구약성경에서 '엘 쇄다이'로 표현되어 하나님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었다(창 17:1;욥 5;17;8:3등). 야훼는 권능의 하나님이시다. 따라서 성도는 곤궁에 처할 때에 도움을 얻기 위허 하나님을 의지해야만 하며, 하나님으로부터 능력을 받아야만 한다(신 8:17, 18;시 46:1;86:16;사 41:10). 하나님의 능력은 변덕스럽지 않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능력은 일관된 당신의 뜻과 공의로운 계획에 따라 행사되기 때문이다(사 5:16).

거룩하시며(하기온) - 구약성경에서 거룩이란 개념이 하나님께 적용되면 그것은 모든 피조물 위에 뛰어나시고 모든 피조물로부터 분리된 그분의 초월성을 뜻하며(출 3:4, 5) 또한 윤리적으로 무흠하신 성품을 뜻한다(레 11:44;벧전 1:16). 그리고 이 말이 사람에게 적용되면 의식상의 존엄성과 관련되어 쓰인다(출 29:1). 특히 신약성경에서 '거룩하다'는 뜻인 혤라어 '하기오스'는 믿음을 통해 그리스도와 연합됨으로써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를 전가(轉嫁)받은 성도들의 영적 상태를 뜻하거나(고전 1:30) 또는 성령의 인도하심따라 그리스도의 성품에 참예하는 성도들의 윤리적 특성을 묘사하는 말이기도 하다(롬 6:22;고후 7:1).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눅 1:51)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 '힘'에 해당하는 헬라어 '크라토스'는 '힘', '권능', 또는 '권능의 표현', '전능한 행위'등을 나타낸다. 이 단어는 인간의 힘(신8:17), 활의힘(시 76:3), 심지어 바다의 힘(시 89:9)에까지도 관련되지만 대개는 하나님의 무한하신능력(시 62:11;엡 1:19, 20;6:10;골 1:11;딤전 6:16)에 사용된다. 특히 여기서는 하나님의 압도적인 권능을 강조한다. 한편 '그의 팔'은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을 가리키는 구약적 표현이다(신 26:8;시 89:13;118:15). 여기서 마리아는 과거에 하나님이 교만하게 당신을 반대했던 권세가들을 물리치시며(출 15:1, 22;단 4:24-27) 겸손한 자들에게 축복을 허락하셨던 사실(창 41:16;단 1:8-21)을 언급하면서 하나님의 공평하신 심판을 찬양하고 있다. 하나님은 사람들의 삶의 상황과 무관하게 천상(天上)에만 계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삶에 깊숙이 개입하시며, 또한 모든 불의하고 왜곡된 상황이 하나님의 개입으로 바로 잡히게 되리라는 사상이 이 노래 속에 강렬하게 함축되어 있다.

흩으셨고 - '디에스코르피센'의 원형 '디아스코르피조'는 '흩다', '낭비하다', '탕진하다'의 뜻이다. 구약에서 이 말은 원수들에게 내려진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사용되었다(삼하 22:15).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눅 1:52)

권세 있는 자를...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 원어상 '권세 있는 자'는 '주권자', '통치자'를 뜻하며 '위'(位)는 '왕좌', '보좌'를 뜻한다. 따라서 본절은 '압제자들을 그들의 보좌에서 쫓아내셨으며'라고 옮겨질 수 있다. 마리아는 본절과 다음절에서 약자와 강자 사이에 행하시는 하나님의 공변된 보응을 대조시키고 있다. 성경에는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징계하신 사건이 많이 기록되어 있다. 예컨대 바로(출5:1-11), 고라와 그의 동료(민 16장), 하만(에6:6-14), 느부갓네살(단 4:24-37), 벧사살(단 5장), 아마샤(왕하 14:1) 그리고 웃시야(대하 26:16) 등의 경우가 그러하다. 물론 성경은 권세나 부(부) 자체를 나쁜 것이라 규정하지는 않으며 오히려 그것들을 하나님의 축복의 산물로 간주한다. 그러나 여기서 거론된 것은 하나님을 떠난 잘못된 권력과 부의 행사를 말한다. 교만하고 강한 자는 낮아지고 비천한 자가 높아지며 굶주린 자가 배부르게 되리라는 이 사상은 예수의 산상 수훈 가운데 표출되어 있는 것이기도 하다(마 5:3-6 주석 참조).



"주리는 자를...배불리셨으며"(53) - 누가는 사회적으로 소외된 자들과 멸시받는 자들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나타내었으며(15:1-32), 당시의 특권층과 기득권자들에로의 부의 집중으로인해 빈민층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던 다수 백성들에 대한 깊은 관심을 표명하였다. 예컨대, 가난한 자에게 임할 축복과 부자들에게 미칠 화에 관한 설교(6:20-26),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12:13-21) 등이 그러하며 본절 또한 그 중 한 예에 속한다. '배불리셨으며'에 해당하는 '에네플레센'의 원형은 '엠피플레미'로서 '가득 채우다', '만족케하다'는 뜻이다. 이 동사는 우리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포괄할 수 있을 만큼 폭 넒은 용어이며 그릇에 더 이상 담을 수 없을 만큼 가득 채웠음을 의미한다.

"부자를 공수로 보내셨도다"(53) - 본문에서 부자는 자기 중심적이며 자신들의 이익과 결부된 데에만 관심을 가지는 자들을 일컫는다. 하나님은 사리 사욕에만 급급하는 자들에게는 켤코 은혜를 내리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그들이 자랑하는 부를 많이 가질수록 그들의 속은 그만큼 텅비케 된다. 더욱이 그들의 부가 완전한 절망으로 바뀔 수도 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어느 누구도 부유해질 수 없다는 사실은 육체적이고 물질적인 면뿐만 아니라 영적인 면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한편, 이 모든 공의의 실현이 앞으로 오실 메시야를 통해 실현되리라는 것이 절대적으로 확실하기에 마리아는 이 찬송시(讚頌詩)에서 계속 과거 시상을 사용하고 있다.

"그 종 이스라엘을 도우사"(54) - '종'에 해당하는 '파이도스'의 원형 '파이스'는 '어린아이'(소년, 소녀)란 뜻이며 혈통과 관련하여서는 '아들', 사회적 신분과 관련하여서는 '종'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유일하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도록 택하심받은 언약 공동체이다.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만 그 존재 의의를 지닐수 있었으며, 이방인들은 이러한 언약 공동체에 속함으로써 비로소 하나님과의 신령한 관계에 들어갈 수 있었다. 구약 시대에는 '긍휼'과 '도움'이 원칙적으로는 이스라엘에게 한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말라기 이후 400년 동안 이스라엘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할 선지자가 끊김으로써 소위 암혹기가 진행되었다. 그러던 중 이 암흑을 뚫고서 구원의 새로운 빛이 임하고, 조상에게 약속하신 바를 이루실 메시야가 마침내 도래하셨다. 그리고 이 약속의 대상은 이제 민족과 혈통의 구별을 초월한 영적 이스라엘로 확대된 것이다(롬 9:6;갈 3:16;6:16). 사실상 이방인 구원은 구약 속에 이미 태동되어 있던 구속사의 한 주제였다(사 43:5, 6;49:12;59:19;말 1:11 등).

"기억하시되(므네스데나이)" - 이 말의 헬라어 원형 '밈네스코'는 '기억하다', '마음에 간직하다' 등의 뜻으로서 언약하신 바를 반드시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신실성과 관련하여 주로 언급된다(창 9:15이하;출 2:24).우리 조상에게...영원히 하시리로다 - 마리아의 찬양은 선민 이스라엘을 위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감사하는 내용으로 끝을 맺는다. 그녀는, 이스라엘 백성의 조상들 곧 아브라함과(창 12:3) 이삭과(창 26:3, 4) 야곱에게(창 28:14) 맺으신 약속대로 언약 백성을 도우신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들어 장래에도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가 함께 하시리라는 강한 확신(確信)을 표명하고 있다.

"마리아가 석 달쯤 함께 있다가 집으로 돌아가니라"(눅 1:56) - 36절에 의하면 엘리사벳은 이미 임신 6개월의 몸이었다. 이 이후에 마리아가 방문하여 3개월을 함께 보내었으니 엘리사벳은 임신 9개월이 되어 해산할 시기가 임박하였다. 마리아가 3개월이나 함께 있다가 엘리사벳벱의 해산을 보지 않고 돌연 집으로 돌아간 것인지 아니면 해산을 보고 돌아갔는지에 관해서는 분명하지않다. 그리고 엘리사벳의 해산 이전에 돌아갔을 경우, 그 이유 또한 확실히 제시할 수 없다. 여하튼 마리아는 집으로 돌아간 이후에 가이사 아구스도의 호적 명령으로 요셉과 함께 나사렛에서 베들레헴까지 여행하게 된다(눅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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