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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이 말하는 고난(passion)의 의미

by 소소한행복^^ 2023. 1.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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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단어는 일차적으로 희생의 제물이 당하는 고난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는데,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파테마(πάθημα)로서, 이것은 파스코(πάσχω, 내가 고난 당하다)에서 파생된 말이며, 벌게이트 역(the Vulgate)에서는 'passio'로 번역되었다(롬8:18;고후1:6,7;딤후 3;11;히10:32;벧전5:9). 이 말은 특별히 그리스도의 고난을 가리키는 데 사용된다. AV와 ERV의 사도행전 1:3에서 파테인(παθεῖν)은 'passio'로 번역되었고, 벌게이트 역은 다른 곳(고후1:5;빌3:10;히2:9,10;벧전1:11;4:13;5:1)에서 '파테마'를 'passio'로 번역했다. 이 단어는 라틴 교회의 저자들에 의해 사용되었으며, 일찌기 무라토리 단편(Muratorian Frigment)에도 사용되었는데, 고난'(passion)이란 말은 고대 영국 교회의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한 기도서(1549년의 기도서)에도 나타난다.
  
벌게이트 역에는 '파씨오'(passio)란 말이 육체의 고통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레 15:13,25).
고난은 또한 내적인 감정의 경험을 표현하는 말이기도 하다. 그래서 AV에는 호모이오파테스(ὁμοιοπαθής 행14:15;약5:17)가 '같은 성정'(성정이 같은)으로 번역되어 있다. 이 단어의 어근은 파토스와 연관되어 있는데(롬1:26,부끄러운 욕심;살전4:5,색욕), 벌게이트 역에는 이 단어가 역시 '파씨오'(passio,정욕)로 번역되었으며, 로마서 7:5의 파테마도 역시 '파씨오'(passio,정욕)으로 번역되었다. 이 단어가 마지막 예에서와 같이 '정욕'(색욕)이란 나쁜 의미로도 쓰였는데, 오늘날에는 주로 강한 욕망을 나타내는 말로 사용된다.
  
    
고난의 의미를 지닌 히브리어는 아주 많다. 그 중에 중요한 것들은 다음과  같다.
  
1)야사르(יסר): 이 말에 있어서 고난(고통)의 목적은 징계하는 것(호10:10)과 교훈하는 것(시2:10)과 훈계하는 것(렘6:8) 등이다.
  
"그런즉 군왕들아 너희는 지혜를 얻으며 세상의 관원들아 교훈(יסר)을 받을지어다"(시 2:10)


2)아나(ענה): 이것은 남을 괴롭히다(창15;13), 괴롭게하다(민24:24), 고난을 당하다(시107:17) 등을 뜻한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정녕히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ענה) 하리니"(창 15:13)

3)차라르(צרר): 이 단어의 일차적인 뜻은 속박하다, 압박하다인데, 이것이 고난당하다, 괴롭히다(렘10:18)란  뜻으로 발전했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이 땅에 거하는 자를 이번에는 내어던질 것이라 그들을 괴롭게(צרר) 하여 깨닫게 하리라 하셨느니라"(렘 10:18)
    
영어 흠정역(AV)에서 이 단어는 종종 '허용하다, 견디다, 참다'의 뜻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이 단어는 불쾌하고 고통스러운 일을 당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 항목에서는 이러한 의미에 대해서 논하겠다.
    
이 말에 해당하는 신약성경의 헬라어는 일반적으로 파스코(πάσχω)이다. 이 단어는 신약성경에 42회 나오고, 칠십인역에는 외경을 포함하여 약 20회 나온다. 그 기본적인 뜻은 '경험하다'이지만, 헬라 문학에서는 거의 예외없이 불쾌한 경험이나 고통을 의미하고 있다.
    
인류 역사상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고통과 고난의 문제는 해결해야 할 가장 중대한 문제점이 되어 왔다. 옛 세대에서 이 문제는 다음과 같이 표현되었다.  "에피큐리안파의 딜레마는 여전히 우리에게도 남아 있다. 만일 하나님께서 악을 제거하기를 원하시지만 제거할 능력이 없으시다면, 그는 무능력한 분이고, 만일 그가 악을 제거하실 수 있지만 그렇게 하기를 원치 않으신다면, 그는 마음이 악한 분이시며, 만일 그가 악을 제거할 능력과 의지를 모두 가지고 계신다면, 악은 어디서부터 오는 것일까?"
    
또 고난의 문제에 관해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할 수가 있다. 도덕적인 선(善)이란 인간의 모든 삶을 통해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고난을 통해서만 이룩될 수 있는 것인가? 만일 그렇다면, 창조의 목적이나 인간의 선악과는 전혀 상관없이 이 우주 자체에는 아직도 고난이 남아 있는 것인가?
    
이 문제에 대한 철학자들의 대답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이 우주적 고통에 대해 실망한 나머지 야기된 쾌락주의와 염세주의, 그리고 스토아 철학이 이 문제에 도전했으나 실패로 끝나 버렸고, 사회 개량주의자는 주장하기를 사회가 발전함에 따라 고통은 점점 감소해 가다가 마지막에는 고통이 완전히 사라져 버릴 것이라고 하며, 낙관주의자는 주장하기를 달성될 수 있는 도덕적인 선이라고 한다.
    
고난(고통)에 대한 철학적인 해답들은 그것이 제아무리 매력적일지라도 사변적인 것에 불과한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고난의 이유와 기원에 관해서는 분명한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 단지 그는 고난에 대처하여 그것을 이길 수 있는 길을 제시하셨을 뿐이다. 그는 고난 속에서도 승리의 삶을 사셨던 분이다. 그가 이러한 고난을 승리로 이끄신 비결을 이 고난 속에서 하나님(아버지)의 뜻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아버지(하나님)의 뜻에 복종함으로 말미암아 인생에 있어서 고난의 가시체를 배제해 버리기보다는 극복해냈던 것이다. 이러한 예수님께서는 고난을 맞이하여 그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그에 복종하는 사람들에게는 그와 같은 승리를 기약해 주고 있는 것이다.
    
고통의 문제란 도덕적인 악(evil)의 문제를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다. 세상의 외적인 악이 제아무리 무시무시한 것일지라도, 그것은 더 심각한 '죄'(sin)의 문제에 비해서 이차적이고 부수적인 것이다. 만일 하나님과 단절된 관계가 해결되기만 한다면 다른 모든 문제들은 궁극적으로 해결될 수 있는 것들이다. 온 세상에 가득찬 '고통'의 문제를 궁극적으로 해결하는 길은 하나님과의 '화목'(reconciliation)이다. 이 하나님과의 화목이 이루어지기만 하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된다."
    
기독교의 메시지 속에서 우리는 '고난의 하나님'(즉, 그리스도 예수=역자 주)이 계시된 것을 발견하게 된다. 십자가는 그리스도의 변증적이고 숭고하고  장엄한 비전인 것이다.(히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2:2)
    
인간은 그러한 화목 속에서 고난의 하나님과 만날 수 있고, 그렇게 함으로 말미암아 염세주의에서 참된 낙관주의에로, 혼돈과 불확실로부터 고난이 사라진 영원한 소망 가운데로(계21:4) 그들의 고난이 변화되는 것이다(롬8:15-17:RSV).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롬 8: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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