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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로와 은혜

by 소소한행복^^ 2023. 1.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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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단어를 성경에서 찾아볼 수는 없지만 이 단어 안에 내포된 개념은 구원의 교리에 극히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리스도 시대에 유대주의는 율법적인 색채를 강하게 띠고 발전하였는데 이는 신구약 중간기를 통해서 증명이 되며(예, 토빗서12:9) 주님과 서기관들과의 대화 속에 잘 반영되어 있다. 속사도 시대의 교회들은 이 율법적 유대주의에 강한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는데 그 이유는 그리스도인의 신앙이란 영생을 얻기 위해 지켜야 할 새 율법이라고 원래적으로생각했기 때문이다.
    
비록 어거스틴이 하나님의 은혜를 찬미했다고 할지라도, 그는 영생이 공로의 결과로 주어지는 것이라는 입장을 취했다. 그는 사람이 선언한 업적을 쌓을 수 있기 위하여는 은혜란 필수적인 것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이 가르침을 옹호하고자 했다.
    
스콜라 학자들의 대표적인 입장은 세례로 인한 은혜는 지난 날의 죄를 사해줄 뿐만 아니라 그와 동시에 공로를 쌓을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해 준다는 것이었다. 일치의 공로와 당위적인 공로는 구별되어졌다. 전자는 일반 은총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자연인이 자신을 선에 복종시키고 그럼으로써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충분한 덕을 가졌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특별 은통으로 주어지는 두번째 단계인 당위의 공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로마 가톨릭의 경우, 첫번째 단계는 칭의의 방향을 제공하고 두번째 단계는 영생으로 인도한다는 것이다.
    
헤일즈의 알렉산더(Alexander of Hales)는 공로의 보고(寶庫) 교리를  발전시켰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는 충분하고도 넘치는 것이었다. 또한 많은 성인들의 희생적인 업적들은 그들 자신이 천국에 들어가는 데 있어서 충분하고도 남는 것이다. 이러한 초과된 공로들은 공로가 모자라는 자나 회개한 영혼들에게 유효한 것 이다. 아퀴나스(Apuinas)는 이런 개념을 찬성하여, 교회의 구성원 상호간 그리고 머리되신 그리스도와 구성원을 하나로 묶는 신비스런 연합을 강조함으로써 그 개념을 강화시키려고 했다. 이 교리의 근거가 되는 구절로 골로새서1;24이 자주 인용되는데 이 교리는 역사적으로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전까지 로마 교회에 있었던 면죄부 제도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
    
로마 가톨릭 신학은 공로의 개념과 불가분의 관계로 이어진다. "선행은 진실로 매우 공로적인 것이며 그것은 어떤 특정한 보상뿐만 아니라 영생 그 자체도 보상으로 받는다".(Bellarmine).
    
일반적인 주제에 관한 성경의 자료를 조직적으로 구성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한편으로는 선을 행한다는 것이 궁극적으로 생명에 이르게 한다는 것을  알게 하지만(롬2:6,7;행10:35) 그것이 공로라고는 인식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대로 보응하시되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롬 2:6-7)

"각 나라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받으시는줄 깨달았도다"(행 10:35)

오히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욕망은 그것을 입증하려는 사람들을 구원의 복음을 알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보증 안에서 그것의 충만함을 발견하는 데 있다. 확실히 바울의 가르침은, 인격을 가치있게 다듬거나 혹은 율법을 착실히 가치있게 다듬거나 혹은 율법을 착실히 지켜가는 생활이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의(義)가 될 수 없다는 것임이 분명하다.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롬 3:22)

로마서 3:22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의가 미친다'라고 진술하지 않고 '믿는 자'(투스 피스튜온타스)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이와 유사한 구절이 갈 2:16에도 나타나는데 그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이다. 본서에서는 이를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라고 표현하였다(1:17).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전적으로 부패한 인류는 스스로 믿음을 가질 만한 능력도 가지지 못했고 스스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도 없었다. 죄인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것은 철저하게 먼저 부르시는 하나님의 역사에 의존하고 있으며 그리스도의 공로에 의지하여 비로소 믿음을 얻게 된다. 인간은 믿음 때문에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믿음조차도 인간의 공로나 업적이 될 수 없다는 것이 본절에서 시사하고자 하는 바울의 의도이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일 뿐이며 그 주시는 것 외에 그 어떠한 것도 더할 수 없다. 특히 '믿는 자'를 현재 분사형으로 기록한 것은 현재적인 믿음의 구체적인 것들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믿음은 과거의 것으로 유효한 것도 아니며 미래의 예정으로 유효한 것도 아니다. 그것은 현재 속에서 계속 믿고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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