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적으로 볼 때 교부란 신앙면에서 오늘날의 우리들보다 앞서고, 따라서 우리에게 교훈을 줄 수 있는 위치에 있는 분들을 가리킨다. 이러한 의미에서 목사들과 특히 주교들은 교부로 언급되기도 한다. 그러나 특별히 이 용어는 고대의 기독교 저술가들 중에서 뛰어난 사람들에게 적용되어 왔다. 일찌기 4세기에는 이 용어가 당시의 모든 스승들에 대해서 사용되었으며, 후에는 적어도 1세기부터 6세기까지의 위대한 신학자들을 교부라고 호칭하고 있다.(물론 오늘날에도 때로는 종교개혁자들을 종교개혁 시대의 교부라고 칭하기도 한다)
어떻게 해서 어떤 저술가는 교부로 불리울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이 제기될 수 있을 것이다. 현존한 저서만으로써 교부의 자격을 평가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왜냐하면 교부로 인정된 자들은 거의 무가치한 것들도 있기 때문이다. 교부의 자격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네 가지의 주된 특징들이 제시되어왔다. 첫째로 내용상의 정통성. 둘째로 거룩한 삶. 세째로 보편적 공인성. 네째로 고대성(古代性). 교부들은 그 시대에 신앙의 다양성에 비추어 볼 때, 어떤 점에서 각각 잘못된 점들을 가지고 있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상 네 가지의 일반적인 원칙에 부응하는 한 교부로 간주되고, 그들의 책도 교부적 저서로서 읽혀질 수 있을 것이다.(특히 Origen과 Tertullian의 경우를 참조하라)
교부들의 권위에 대한 문제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대답이 제시될 수 있을 것이다.
로마 가톨릭 교회의 입장에서 볼 때, 교부들은 그들이 전원일치적인 견해를 나타낼 때에는 무오(無誤)한 것으로 간주된다.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그들의 견해는 언제나 존경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개신교회는 교부들의 견해도 최고의 규범인 성경에 의해 마땅히 지배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교부들의 언급이나 해석도 거부될 수 있고, 시정될 수 있으며, 보충될 수도 있다고 한다. 반면에 이러한 교부들은 신앙에 있어서 우리보다 앞선 분들이고, 성경 진리와 사도들의 교훈을 설명해 보려고 진지하게 노력했던 분들이므로 마땅히 존중되어야 한다.
따라서 교부들의 업적은 가치있는 것이며, 그들의 견해는 주의깊게 연구되어져야 하고 그것들은 충분한 이유가 있는 것으로 취급되어야 한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들의 저서가 그들에게 도전적인 것 못지 않게 그들의 저서도 우리들에게 도전적이다.
모든 교부들을 이 짧은 지면에서 다 열거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뿐만 아니라 교부들은 '헬라 교부'(Greek Fathers)와 '라틴 교부'(Latin Fathers)로 대별하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그들을 자세하게 분류하는 것도 쉽지마는 않다. 먼저 최초의 기독교 문헌들을 남겼던 '사도적 교부'(혹은 속사도 교부)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2세기 말과 3세기 초의 알렉산드리아 학파 Clement와 Origen을 마땅히 언급할 수 있다. 또한 당시의 저술자들인 이레니우스(Irenaeus), 터눌리안(Tertullian), 히풀리투스(Hippolytus), 키프리안(Cyprian)도 마땅히 언급되어야 할 것이다. 이미 앞에서 언급한 대로 4세기에는 다음과 같은 위대한 교부들이 생존했었다. 아다나시우스(Athanasius), 힐라리(Hilary), 바질(Basil), 니사의 그레고리(Gregory of Nyssa),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Gregory of Nyssa), 암브로우스(Ambrose), 어거스틴(Augustine), 크리소스톰(Chrysostom), 제롬(Jerome). 이외에 언급될 수 있는 교부들로서는 '씨릴'이라는 이름을 가진 교부들(Cyrils), 데오도렛(Theodoret), 교황 레오 1세(Leo I), 그레고리 1세(Gregory I)가 있다. 마지막 교부들로서는 다메섹의 요한(John of damascus)과 세비레의 이시도레(Isidore of Seville)가 있다. 그러나 이상 열거한 교부들은 수많은 교부들 중의 일부에 불과하다. 이러한 교부들은 역사적인 수많은 난관과 장애를 뛰어넘어서 오늘날 우리들의 교회에 고대의 위대한 신학적 업적을 물려 주고 있다.
카테고리 없음
교부
반응형
728x90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