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용'(moderation)이란 말은 AV에서는 '절제'란 말로 나온다(RV의 난하주에는 '온화'로 기록되어 있다. 이 말은 형용사 에피에이케스(ἐπιεικής)에서 온 중성 명사를 번역한 것으로 디모데전서 3;3, 디도서 3;2, 야고보서 3;17, 베드로전서 2:18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딤전3;3은 AV 외의 번역본에 '온화한'으로 되어 있다). 명사 에피에이케이아는 사도행전 24;4(관용)과 고린도후서 10:1(관용)에 나온다.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오직 관용(ἐπιεικής)하며 다투지 아니하며 돈을 사랑치 아니하며"(딤전 3:3)
화평(해당 항목 참조)과 오래 참음에 대한 의미가 적절치 못하게 되고 음식, 술에 빠지는 것을 '관용'해야 한다는 현세대의 해석도 잘못된 것이다.
바클레이(Wm. Barclay)는 '공의보다 더 좋은 것'이란 제하에 에피에이케스를 설명하면서 이 용어를 옳게 번역하는 것이 어렵다는 트렌취(Trench)의 의견에 동의하였다.
'관용'이란 말은 자신의 권리만을 주장하거나 율법의 문자에 얽매여 그것만을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공평과 공정의 마음가짐으로 다른 사람들의 안녕을 고려해 줄 줄 아는 사려깊은 의지를 의미한다. 이것이 결여될 때 분쟁이 야기될 수 있다(빌 4:2-5). 그리스도의 에피에이케이아(관용, 고후10:1)는 요한복음 8:1-11과 특히 빌립보서 2:5-8에 잘 나타나 있다.
관용이라는 영어 toleration은 tolerare(인내하다라는 뜻)라는 라틴어에서 유래했다. 엄격한 의미에 있어서 이 관용이라는 말은 어떤 것이 바람직하지 못한 것일지라도 그것을 그대로 용납하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이 말은 어떤 기계의 부속품이 작동하는 데 있어서 그 정밀도의 부정확성이 허용될 수 있는 범위를 가리키기도 하고, 또한 신체 조직의 기능에 있어서 그것이 약물이나 독성을 포용할 수 있는 수용 능력을 가리키기도 한다. 그러나 보다 더 일반적으로는, 이 말이 실제에 있어서는 옳다고 인정할 수 없는 견해나 관습이지만 그것을 참고 용납해 주는 것이나, 또는 그러한 견해를 갖고 있거나 관습을 실행하는 사람들을 참고 용서해 주는 것을 가리킨다. 후자와 같이 보다 더 엄격한 의미의 관용이라는 말에는 관용을 베푸는 사람의 우위성이 분명하게 드러나있다. 그리하여 법적으로는 하나의 교회(영국 국교회, the Anglican Church를 가리킴= 역자 주)만을 인정하지만 특수한 제한 조건하에서는 이 국교에 반대하는 종교 집단의 존재를 허용한다는 1689년 반포된 영국 윌리엄 3세와 메리 1세의 칙령 Gee와 Hardy의 [영국 국교회의 사료집]을 원래 관용령(The Toleration Act)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의미에서 관용을 획득한다는 것은 아첨하므로써 얻어지는 것을 뜻하지 않고 최선의 노력과 투쟁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1685년 존 로크(John Locke)의 "관용에 관한 서한"(Letter on Toliration) 등이 발표된 이후로 일반화된 것과 같이 관용에 관한 호소문들이 발표될 때에는 어떤 하나의 의견이나 단체가 더 위위에 있다는 판단은 고려(강조)되지 않는다(비록 아직 잠정적으로는 인정될지 몰라도). 이러한 호소들은 자기 자신의 견해보다는 다른 사람들, 즉 그러한 호소를 하고 있는 사람들의 견해가 마땅히 존중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투쟁들인 것이다. 이에 대한 근대의 전형적인 예는 베인톤(Roland H. Bainton)의 [신앙의 자유를 위한 진통](The Travail of Religious Liberth)이다.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으로...."(고후 10:1)
이 온유(溫柔)와 관용(寬容)은 그리스도의 성품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께서는 자신을 온유한 자로 소개하셨을 뿐 아니라(마 11:29) 온유한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다(마 5:5). 혹자는 예수에게 있어서 '온유함'은 이기적인 사랑이 아닌 이타적인 사랑에서 생겨나는 힘으로 영적인 차원의 것이라고 보았다(Lowery). 또 혹자는 '온유함'을 기독교의 특징적인 덕목 또는 은사로 여겼다(Barrett, 갈 5:23; 6:1). 어떤 의미로 사용되었든지 간에 이 온유함은 다른 사람에 대한 관대한 태도로 나타난다. 바울 자신의 삶이 예수에 의해 규정된다고 할 때 그는 예수를 본받아 '온유함'과 '관용'의 덕목으로 규정되는 삶을 살고자 했고 인내와 용서의 삶을 살고자 했다. 바로 이러한 그의 삶이 적대자들에 의해 오해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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