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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 구속하다, 속전하다

by 소소한행복^^ 2023. 1.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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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이라는 말이 비록 구원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지만 그것은 더욱 특별한 뜻을 지니고 있다. 왜냐하면 구속이라는 말은 속전(대속물)을 지불함으로써 구원을 성취하시는 특히 구원의 수단을 가리키는 말이기 때문이다.
  
구속이라는 말은 '구원'을 받음에 있어서 일시적이고 물리적인 구원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구약 성경에 있어서 구속을 가리키는 주요한 단어들은 '파다'(פּדה)와 '가알'(גּאל)인데 이것이 칠십인역에는 '뤼트루스다이(λυτρώσηται)'로 때로는 보통 동사형이며 명사를 뤼트로시스(λυτρώσις)와 '아폴뤼트로시스(ὰπολύτρωσις)'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아고라제인(ἀγοράζειν)
이나 여사고라제(ἐξηγόραζε)이 사용되는데, 이 단어는 시장, 특히 노예 시장에서 노예를 사는 행위를 가리키는 말이다. 속전(대속물)에 대해서는 '뤼트론(λυτρον')'과 '안틸뤼트론(ἀντίλυτρον)'이 사용된다.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소유물과 생명이 모두 적절한 금전 지급을 통해서 속함을 받을(구속될) 수 있었다. 처음 난 것은 하나님이 애굽을 치시는 열 재앙 중 마지막 재앙에서 죽임으로부터 면제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하신다. 그래서 처음 난 것은 그후부터 돈을 지불함으로써 속함(구속을) 받아야 한다(출 13:13-15). 모세 오경의 율법에 의하면 어떤 사람이 빚 때문에 자기 기업을 잃어 버리고 종으로 팔리울 때 그와 그의 재산은 그의 가까운 친척이 대속금을 지불함으로써 대속을 받을 수 있었다(레25:25-27,47-54;롯4:1-12 참조). 이처럼 대속할 수 있는  친척은 때로는 피의 복수자가 되기도 했다.('고엘' 참조)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심은 '구속'으로 언급되어졌으며(출 6:6;15:13),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구속자'로 언급되었다(시78:35). 여기서  강조점은 이러한 구속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크게 힘이 필요하다는 사실에 있다. 이 '힘'은 일종의 '대속금'의 역할을 하는 셈이다. 또 다시 하나님의 백성은(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는데 여기서 그들이  해방되는 것도 '구속'이란 말이 사용되었다(렘 31:11;50:33,34). 이사야 43:3의 개인적인 의미는 바벧론의 정복자이자 유대인을 해방시킨 사람인 고레스가 아프리카를 지배할 것이 약속되어 있으며 이것은 유대인을 포로로 삼지 않고 그들에게 가나안 땅의 기업을 되돌려 주는 데 대한 보상으로 약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욥기 19:25에서와 같이 개인도 역시 때로는 하나님의 구속의 대상이 되고 있다. 거기에서 고난당하는 자는 현재의 상황은 그 반대가 되어 있지만 마침내 자기를 변호해 주실 살아 계신 '구속주'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고 있다. 잠언 23:10,11도 동일한 사상을 나타내고 있다.
    
다소 놀라운 사실은 구약에 있어서 이 '구속'이 문자적으로는 죄와 거의 연관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시편 130:8에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그 모든 죄악에서 구속하실 것이라는 약속이 주어져 있다. 바울이 로마서 11:26에 인용한 이사야 59:20에는 동일한 사실이 보다 더 일반적인 말로 언급되어 있다(사44:22 참조). 시편 49:7에는 자기 생명에 대한 대속을 스스로는 이룰 수 없다는 사실이 강조되어 있다. 구약성경에서 죄로부터 구속받는 것에 대한 언급이 희귀한 사실은 제사 제도를 통하여 대속이 언제나 그 당시에 선포되고 있기 때문인데 이러한 선을 따라 공식적인 언급을 하는 것은 다소 미신적이다. 더구나 바벧론에 포로됨과 같은 생활상의 잘못들로부터 구속받는 데에는 하나님께서 죄로부터 구속하셨다는 생각이 불가피하게 수반될 것이다. 왜냐하면 포로된 것은 죄 때문이었기 때문이다.(사46:2 참조)
    
속전(대속물)이라는 요소가 명백하게 포함되어 있지 않고 구속이 언급된 구절들이 구약성경에는 많이 나오기 때문에 어떤 학자들은 구속이란 어떤 속전(대속물)을 그 조건이나 근거로 하지 않는 단순한 구원을 의미한다고 주장하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는 능력이 나타남은 때때로 유일한 강조점인 것  같다(신9:26 참조). 그러나 그 반면에 속전이 배제되어 있다는 데 대한 암시도 전혀 없다.  그러므로 '속전'에 대한 개념은 바로 구원하기 위해 필요한 능력이 나타나는 사실의 배후에 담겨져 있는 것으로 간주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이러한 관찰을 통해서 구속에 대한 신약성경의 용법이 구약성경의 그것과 연관된다. 복음서에 나오는 어떤 구절들을 볼 때 이 구속이라는 말이 다소 모호하게 사용되고 있음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지불되어야 할 어떤 속전(대속물)에 대한 특별한  언급도 없이 자기 백성을 위해서 중재(仲載)하시는  것을 의미한다.(눅2:38;24:21).
    
마태복음 10:45은 비록 그 구절 안에 '구속하다'라는 말은 없지만 '구속'이라는 주제에 대한 결정적인 구절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 구절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선교적 사명에 대한 그의 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의 목회적 일생은 자신을 희생제물로 드림으로써 끝이 났는데 이것은 그것을 필요로 하는 많은 사람들을 위한 속전이었다. 신약성경에 있어서 이 교리가 가장 길게 전개된 곳은 바울 서신이다. 그리스도께 서는 율법의 저주에서부터 구속하셨다(갈 3:13;4:5-이 두 구절에서 엑사고라제인).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의 사역에 관해 가장 관심이 집중된 부분에서 구속을 칭의나  화목과 연결시키고 있다(롬3:24; 고전1:30 참조). 바울이 '구속'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뚜렷한 한 가지 특색은 그가 그 단어를 이중적(二重的)인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피의 속전에 근거하여 현재에 죄를 용서받은  것(엡1:7; 벧전1:18,19 참조)과 육체가 썩기 쉽고 연약한데서부터 미래에 구원받을  것(롬8:23)을 말한다. 이 두번째 사건은 '구속의 날'(엡4:30)과 연관되어 있는데 그것은 그 때에 구속이 처음으로 성취될 것이라는 의미가 아니고 그리스도께서 이루셨다고 우리 영혼이 죄 용서함 받는 데 적용되었던 그 구속이 그 때에는 육체의 구속까지 확장되어 이룩됨으로써 구원이 본래 의도된 대로 완성을 이룩하게 된다는 의미이다.
    
구속이란 물론 그 안에 구원의 개념이 포함되어 있지만 그보다는 더 정밀한 용어이다. 그렇지 않으면 성경의 기자들은 '구속하다'라는 말을 무시하고 원래 구원을 뜻하는 뤼에인(ῥύειν)이나 뤼에스다이(ῥύεσθαι)라는 단어들을 보다 더 광범위하게 사용했을 것이라고 생각될 수 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중요한 사실은 그리스도께서 적대적인 천사들의 권세(흑암의 권세)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시는 사역에 대하여 기록할 때에는 뤼에스다이라는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만족할 수 있었지만(골1:13), 더 나아가 저의 용서에 대해서 상고할 때에는 그 용어를 구속이라는 용어로 바꾸어 사용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골1:14)
    
그리스도인들이 사용하는 말들 중에 '구속주'라는 말보다도 더 귀하게 취급되어야 할 말은 없다. 왜냐하면 구속주라는 말은 심지어 구주라는 말보다도 더 하나님의 자녀들로 하여금 자기의 구원은 한 개인의 위대한 희생의 값을 지불하여 값주고 산 것이라는-즉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우리들의 죄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해서 자신을 주셨다는-사실을 깨닫게 해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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