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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욕주의

by 소소한행복^^ 2023. 1.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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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라어 아스케이스(연습,훈련)에서 온 금욕주의란 말은 특히 육신에 관련하여 자기 훈련의 실행을 의미한다. 이것은 보통 자제, 예를 들어 금식, 독신 생활의 형식을 취하지만 그러나 이것은 때로 자책과 같은 극단적인 행위에서 더욱 적극적인 형식으로 되어 왔다. 이것은 삶의 여러 영역, 특히 재산의 양도, 혹은 영적인 교화나 봉사를 위하여 지적이며 문화적인 삶의 여러 국면으로부터 물러나는 것 등을 포함할 수 있다.
    
성경은 올바른 형태의 금욕에 대한 여지를 남긴다. 따라서 이스라엘인들에게 십계명을 주시기 전에 그들은 부부간의 성교를 금해야만 하였다(출19:5). 나실인 서약에는 포도주와 독주 및 부정한 고기를 삼가는 일이 포함되었다(삿13:5). 엘리야는 호렙산에 이르기까지 사십 일 간의 금식을 감행하였는데(왕상19:8), 금식은 특히 하나님 앞에서의 통회에 의한 자아 비하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욜2:15이하).
    
신약도 금욕을 배제하지 않는다. 세례 요한은 먹는 것과 입는 것에 있어 매우 엄격하였다(마3:4). 예수께서는 그의 사역을 금식으로 시작하셨으며(마4;1)  그의 사역을 위해 재산, 결혼, 심지어는 가족 관계에 대한 일반적인 인간의 권리를 포기해야만 했다(막3:33이하). 비록 예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금식하라고 가르치지는 않으셨다 하더라도 자기가 떠난 후에는 그들도 그렇게 해야만한다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으며(마 9:15), 어떤 이들은 그를 위해 독신 생활을 해야 하고 통상적인 인간 관계를 포기해야만 한다고 명백히 요구하셨다(마19:12,29). 우리는 바울의 서신을 통하여, 그가 주를 더 기쁘시게 하기 위해 독신 생활의 가치를 인정했다는 것(고전7:32)과, 그의 생활은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와 종이 되기 위한 엄격한 자아 훈련의 생활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전9:27;딤후2:3이하)
    
올바른 금욕에 대한 성경의 일관된 강조는 인상적이지만 그러나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점에 주목해야만 한다.

첫째, 앞서 언급한 것, 예를 들어 음식, 결혼, 재산,  통상적인 인간 관계 등에 본질적으로 악한 무엇이 있다는 것에 대한 어떠한 암시도  없다.
  
둘째, 대개의 경우에 있어 금욕에 대한 보편적이거나 영속적인 어떤 법칙이 없다.

세째, 금욕은 그 자체에 목적이 있지 않으며 그것은 어떤 적극적인 것, 예를 들어 회개, 하나님의 말씀을 듣거나, 더욱 특별하게는 헌신을 위해 행하여진다.
    
금욕의 증거는 도덕적 표준이 낮았던 초기 이교세계에서 특히 가치가 있었다. 대개의 그리스도인들은 대체로 절제에 대한 새로운 표준을 받아들였으며, 새로운 삶과 증거를 위해 보다 엄격한 수준을 유지하려는 사람들도 많이 있었다. 그러므로 금욕적인 삶을 조장하거나 촉진하기 위해 의도된 은둔적이며 수도사적인 운동이 신속한 발전을 보게 된다는 것을 놀라운 일이 아니다. 또한 이러한 운동을 전혀 정죄해서도 안된다. 그것은 너무나 빈번히 영해(靈解)로 말미암아 회피되는 성경의 진술들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러한 운동은 대다수의 사람들에 의해 이행된 것보다 높은 표준에 대한 증거를 지속하였다. 그리고 초기 대부분의 수도사들은 복음주의 사역이나 실제적인 봉사에 있어 첨단에 있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교회의 일반적인 경향은, 성경적인 진정한 금욕의 분명하고도 절대 필요한 세 가지 특징을 잊어 왔다. 특히 영지주의에서 우세했던 이교도의 영향으로 인하여 육신적인 것은 본질적으로 악하며 그러므로 참된 성화와 그리스도에 대한 전적인 순종을 위해서는 육신적인 것을 반드시 포기해야만 한다는 부단한 의식이 있어 왔다. 따라서 독신주의 성직자에 대한 로마 가톨릭교의 주장이나 수도사적인 서약의 영속적인 특징에서와 같은 시도들을 해 왔다. 사람들은 금욕 자체가 공적이라는 것, 곧 금욕주의자들은 보다 높은 수준의 그리스도인의 삶에 도달하고 그들은 연옥을 피하려는 노력에서 미점을 취하게 된다고 상정하여 왔다.
  
이렇게 하여 이원론과 교회 만능주의 및 율법주의의 해악은 참된 금욕을 외곡해옴으로써 방종에로의 전환이나 자아 중심적인 바리새주의(눅18:11이하)에 의해 그 자체들에게 보응을 가하였다. 참된 금욕에 관한 한, 기둥 위에 있는 주상(柱上) 고행자(Stylite, 높은 기둥 꼭대기에서 고행하였음=역자 주)들, '가정부'를 둔 독신 사제나 세상으로부터 고립되어 사적인 교회를 추구하는 수도사보다 더 큰 희극은 있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곡해된 금욕에 대한 최선의 해독제는 성경적이며  복음주의적인 견해이다. 이 견해는 구원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만 있다는 사실에 의존한다. 이것은 금욕 자체에서는 어떠한 보다 뛰어난 미덕이나 미점을 보지 못한다. 이것은 육신적인 것을 실제로 악한 것으로 생각지 않는다. 이것은 극기에 대한 속박적이거나 영속적인 법칙을 받아 들일 수 없다. 그러나 이 견해는 예수 그리스도의 특별한 요구에  순종함에  있어서의 자기 훈련과 자아 부인에 대하여 다양한 표준을 예상하고 있는데 그러한 자기 훈련과 자아 부인은 그리스도에 대한 압도적이며 신실한 사랑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그것은 모두 복음 전도와 교회에 있어서 보다 큰 효력을 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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