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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의 기독론(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중심으로)

by 소소한행복^^ 2023. 1.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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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의 기자들은 예수께서 이루시기 위해 오신 역사와 그가 성취하기 위해 오신 직무의 의미를 묘사함으로써 그가 누구인가를 명시한다. 주로 언제나 구약 특유의 말에 의한 그리스도의 사역과 직무에 대한 다양한 묘사 중에는 하나의 국면을 다른 국면과 결부시켜 단일화시키는 경우가 있으며 보다 조기의 전통을 말소시키는 일이 없이 풍부한 의미를 함축한 발전 단계가 있다.
    

1. 복음서에서의 예수

그의 인성은 마치 그 누구도 이를 문제시 할 수 없을 것처럼 공관복음에서 인정하고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우리는 그가 요람에 누워 있고 자라고 배울 뿐 아니라, 배고품을 느끼고 근심하고 의심하는 그리고 때로는 실망하고  놀라와하며(눅2:40;막 2:15;14:33;15:34;눅7:9). 마침내는 죽으시고 장사 지내어지는 것을 본다. 그러나 다른 곳에서는 그의 진정한 인성을 마치 그것이 의문시되기라도 하거나(갈4:4;요1:14) 그것의 의미가 무시되기라도 하는듯이(히2:9,17;4:15;5:7,8;12:2) 특별히 증언된다.
    
그의 참된 인성에 대한 강조 외에도 바로 그의 인성에 있어 그는 죄가 없으시고 다른 인간들과 전적으로 다르다는 사실과 그를 그외 모든 인간 중 가장 위대하거나 가장 지혜로운, 혹은 가장 거룩한 자로 간주함으로써 그의 중요성을 찾아서는 안된다는 사실에 대한 강조도 항존한다. 동정녀에 의한 탄생과 부활은 여기서 우리가 인간의 영역에 있어 전혀 특별한 무엇을 직면하고 있다는 표징들이다. 그가 누구이며 무엇을 하는 분이신가는 오직 그를 다른 사람들과 비교함으로써 밝혀질 수 있으며 모든 사람이 그에 대조될 때 그의 진상은 가장 밝히 드러난다. 그가 인간으로서 고난을 받고 승리를 위해 우리 가운데 오신 사건은 그가 직면하는 모든 개인과 온 세상의 운명에 대해 전적으로 결정적인 것이다(요3:16-18;10:27,28;12:31;16:11;요일3:8).

그가  오심으로써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였다(막 11:15). 그의 이적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다는 증거들 이다(눅11:20). 그러므로 그 이적들을 그릇되이 해석하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라(막 3:22-29). 그는 하늘에 속한 왕으로서의 권세로 행하시고 말씀하신다.그는 사람들에게 자기를 위해 그들의 생명을 바치라고 도전할 수 있으시다(마10:39). 하늘나라는 바로 그분의 나라이다(마16:28;눅22:30). 그는 솔직이 그 자신의 마음이 어떠한가를 말씀하시는  중에도 하나님의 영원하시고 결정적인 말씀을 하시는 분이시다(마 5:22,28;24:35). 하나님의 말씀이 그러하듯이 그의 말씀은 그것이 선언하는 바를 성취 한다(마8:3;막11:21). 그는 바로 죄를 용서할 권위와 권세를 갖고 계신다(막2;1-12).
    

2. 그리스도

그의 진정한 중요성은 오직 그가 그 중에 태어나신 사람들에 대한 그의 관계를 이해할 때에만 이해될 수 있다. 그의 지상 사역에서 나타난 사건들에서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과 언약이 성취된다. 그는 구약의 사람들도 그들이 기름을 부은  대표자들-선지자, 제사장, 왕들-도 할 수 없는 것을 하기 위해 오신 분이다. 그러나 구약의 사람들은 자기들 중에서 일어날 자가 그들 중 모두가 성취하는 데 전적으로 실패했던 것을 성취하리라는 약속의 말씀을 들어왔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나사렛 예수는 참된 메시야 혹은 자기 사람들의 그리스도(요1:41;롬9:5)가 되도록 성령과 능력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분이시다(행10:38). 그의 세례(마3:13이하)와 그가 이사야 61장의  말씀(눅 4:16-22)을 언급한 사실이 지적해  주듯이 그는 참 선지자이시며(막9:7;눅13:33;요 1;21;6:14) 제사장이실 뿐 아니라, 그러한 기름부으심을 받고 메시야로서의 목적을 성취하심에 있어  그는 그의 동시대인들로부터 그리스도(막8:29)와  다윗의 아들(마 9:27;12:23;15:22;CF눅1:32;롬1:3;계5;5)이란 명칭을 받으셨다.
    
그러나 그는 그 자신을 드리셨을 뿐 아니라 그가 그가 완수하신 직무를 밝혀 주는데 도움이 되고 그가 누구인가를 명시함에 있어 결정적인 그외 많은 명칭들을 얻으셨다. 유대교의 일반적인 메시야 사상을 예수 자신의 가르침 및 신약의 증언과 비교해 볼 때 그 비교는 예수께서 자신이 강조했던 메시야에 관한 구전의 어떤 특정적인 말씀을 채택하셔서 그것이 자신에게서 구체화되게 하셨다는 것을 보여 준다. 메시야에 관한 어떤 명칭들은 그분에 의해 그리고 다른 자들보다는 그분에 대해 사용한 용도에 따라 그리고 그가 그것을 자신에게 적용시킨 관계에 따라 재해석되었다. 바로 이것이 부분적으로는 그의 메시야로서의 침묵(마8:4;16:20;요10:24등)에 대한 이유이다.
    

3. 인자

예수께서는 인자란 말을 다른 자들보다는 더욱 자신에 대해 사용하셨다. 구약에도 인자(Son fo man)란 구가 단지 사람을 의미하는 절들이 있으며(예, 시8:5), 종종 예수께서 이 말을 사용하신 것도 이러한 의미와 일치한다(마8:20참조). 그러나 대다수의 문맥은 인자란 말을 사용함에 있어 예수께서는 다니엘 7:13을 생각하고 계시다는 것을 가리키는데 거기서 인자는 한 개인이자 하나님의 백성의 이상적인 대표자로서 천상적인 인물로 나온다. 계시에 관한 유대인의 구전에 있어 인자는 시대 말에  심판자로서, 그리고 이방인들에 대한 빛으로서 오실 선재자로 간주된다(마14:62참조). 예수께서는 종종 자신의 권세와 능력을 강조할 때 이 명칭을 사용하셨다(막2:10;2:28;눅12:19).

또 다른  ㅡ한편 그는 자신의 겸손과 익명을 강조할  때 이 말을 사용하였다(막 10:45;14:21;눅19:10;9:58). 요한복음에서 이러한 명칭이 그의 선제를 강조할 뿐 아니라 그의 영광을 숨기기도 나타내기도 하는 겸손에서 이세상으로 내려오심(요3;13이하;6:62이하;8:6이하), 하늘과 땅을 통일시키는 그의 역할(요1:51), 인간을 심판하고 메시야로서 잔치를 베풀기 위한 그의 도래(요5:27;6:27)을 강조하는 절들에서 사용된다.
    
비록 인자란 말을 예수께서 오직 자신에 대해서만 사용하긴 하셨지만 이것의 의미는 특히 그리스도가 '하늘에서 내려온 자' 혹은 '둘째 아담'으로 묘사되는 로마서 5장과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다른 방법으로 표현된다.
  
바울은 여기서 그리스도의 도래에는 새로운 창조가 있다(마19:38)는 공관복음들에서의 암시를 들고 있는데 그 새로운 창조에 있어 그리스도의 역할은 첫 창조에서의 아담의 것에 관계되지만 그것과 대조되는 것이다(막1;13;눅3:38 참조). 아담과 그리스도는 인자란 개념에 내표되어 있는 전(全) 인류에 대해 대표적인 관계를 갖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온 인류와의 동일시에 있어 아담의 그것보다 훨씬 더 깊고 완전한 자로 간주된다. 그의 구속 행위에 있어 구원은 모든 인류를 위해  준비되어 있다. 모든 인간은 그분에 대한 믿음으로 이미 그분 안에서 성취된 구원에 참여할 수 있다. 그는 또한 반영하도록 인간이 지음을 받고(고전11:7) 그리스도인들이 새 창조에 참여하는 데서 입도록 의도된 하나님의 형상이자 그 영광이다.(고후4:4,6;골1:15)
    

4. 종

예수의 인간과의 자아 동일시는 이사야가 예언한 고난의 종을 상기시키는  절들(마 12:18;막10:45;눅24:260에서 나타난다. 그가 자기의 모든 사람들 대표하고 세상의 죄를 위해 희생될 자로서(요1:29;사53장) 고난의 임무를 수행하기 시작하는 것은 세례를 받음으로써이다(마3:17;사42:1 참조). 예수는 초대교회의 설교에서 명백히 종이라 불려졌으며(행3:13,26;4:27,30) 그에 대한 그러한 사상은 바울의  심중에도  있었다.(롬4:25;5:19;고후5:21 참조)
      
그는 우리의 인성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자아비하를    통하여(히 2:9,17;4:15;5:7;12:2), 곧 하나님과 인간 간의 영원히 새로운 관계를 초래하는 자아 희생을 통하여 제물 역할뿐 아니라 자신을 단번에 드리는 대제사장 역할을 성취하셨다(히7:27;9:12;10:10). 그가 십자가에서 절정을 이른, 그의 지상 사역에서 이루신 성취인 그의 세례(눅12:50 참조)는 그의 영원한 성직에 대한 자아성별이며 그의 사람들은 그의 자아성별을 통하여 영원히 거룩하게된다.(요17:19;히10:14)
    

5.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아들이란 명칭이 예수 자신에 의해서는 인자란 명칭만큼 자주 사용되지 않았으며(예, 막12:6 참조) 이 명칭은 그가 세례를 받을 때와 변화산에서의 하늘로부터의 음성에 의해(막5:7;15:39) 그에게 주어진 이름이다.
    
하나님의 아들이란 명칭은 메시야에 관련된다. 구약에서 이스라엘이 그 아들로 표현된다(출4:22;호11:1). 왕과 어쩌면 제사장들에게도 이러한 명칭이  주어졌다(시2:7;삼하7:14;말1:6).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이러한 명칭을 사용하고 인정함에 있어 이스라엘의 참된 운명이 완성될 자의 이름을 자취하고 계시다.
    
그러나 또한 이 명칭은 메시야로서의 임무 수행 중 예수의 독특한 자식으로서의 의식을 반영하기도 한다(마11:27;막13:32;14:36;시2:7참조). 이것은 기독론적으로 가장 심원한 암시들을 내포하고 있다.그는 단지 아들(a Son)이 아니라 그 아들(the  Son)이시다(요20:17). 요한은 공관복음에서 숭고한 점들에서 계시되는 이러한 의식을 자신이 언제나 의식하고 있는 예수의 생애의 배경을 이루는 것으로 간주하였다. 이들과 아버지는 뜻(요 4:34;6:38;7:28;8:42;13:3)과 행동(14:10)과 영생을 베푸시는  일(10:30)에 있어 한 분이시다(요5:19,30;16:32). 아들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아들 안에 계시다(10:38;14:10). 아버지처럼 아들도 자기 안에 생명과 즉은 자를 살리는 능력을 갖고 계시다(5:26).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시고 계시며(3:35;10:17;17:23 이하)모든 것을 그의 손에 맏기시고(5:35타) 그에게 심판할 권세를 주셨다(5:22). 이 명칭은 또한 존재와 속성에 있어 하나님과의 단일성 및 기원과 선재의  독특성을  암시한다.(요
  3:16;히1:2)
    

6. 주

비록 바울도 하나님의 아들이란 명칭을 사용하기 하지만 그는 예수에 대해 주란 말을 가장 자주 언급한다. 그러나 주란 말은 바울의 착상이 아니다. 예수는 이미 복음서들에서 주로 언급된다(마7:21;막11:3;눅6:46). 여기서 주란 명칭은 주로 그의 가르치는 권세에 관계되지만 또한 이것은 보다 깊은 의미를 갖고 있다(마8:25;눅5:8). 그가 하나님 우편으로 올라가신 후 이 명칭이 가장 빈번히 그에게 붙여졌지만 이미 그 분 자신이 시편 110:1을 인용하심으로써 이러한 명칭을 그렇게 사용해야 할 것에 대해 준비시키셨다(막12:35;14:62).
    
그의 주권은 역사의 전(全) 과정과 모든 악의 세력 이상까지  미치며(골2:15;고전 2:6-8;8:5;15:24) 그것은 교회생활에 있어 주된 관심사가 되어야만 한다(엡6:7;고전 7:10,25). 그는 주로서 심판하기 위해 다시 오실 것이다.(살후 1:7)
    
자아비하 중의 그의 사역도 그의 주권에 대한 발휘이긴 하지만 주란 명칭을 가장 자의적으로 예수께 붙인 것은 그의 부활과 승천 후의 일이었다(행2:32이하;빌2:1-11).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께 기도했던 것처럼 그에게 기도하였다(행7:59이하;고전1:2;참조,계9:14,21;22:16). 주로서의 그의 이름은 하나님 자신의 것과 가장 밀접하게 결속되어 있다(고전1;3;고후1:2;참조,계17:14;19:16;신10:17).
  
구약에서의 주 하나님의 약속들과 속성들이 그에게 돌려진다(참조, 행2;21,38;롬10:3;욜2:32;살전 5;2;암5:18;빌2:10이하;사45:23). 하나님 자신에 대해 쓰이는 말과 공식어가 거리낌 없이 예수에게 적용되기 때문에 로마서9:5에서처럼 언급되고 있는 것이  아버지(성부)인지 아들(성자)인지를 결정하기가 어렵다. 요한복음1;1,18,20:28,  데살로니가후서 1:12, 디모데전서 3:16, 디도서 2;13, 베드로후서 1:1에서 예수는 하나님으로 고백되고 있다.
    

7. 말씀

"말씀이 육신이 되어"(요1:14)란 진술은 예수를(예를 들면, 잠8장과 같이 인격적인 특징을 갖고 있는) 구약에서의 하나님의 율법에 관련시키는데 그 이유는 그것들이 하나님께서 말씀을 발하시는데서 계시되고 선언되기 때문이며 그는 말씀으로 우주를 창조하시고, 자신을 게시하시며, 역사 안에서 자신의 뜻을 성취하신다(시33:6;사55:10이하;11:4;계1:16). 여기서 말씀과 사건 간에 밀접한 관계가 있다. 신약에서는 말씀이 단지 선언된 메시지가 아니라 그리스도 자신이라는 것이 더욱 명백하여진다(엡3:17;골
  3:16;벧전1:3,23;요8:31;15:17 참조). 바울이 골로새서 1장에서 표현하고 있는 것을 요한은 그의 복음서 서언에서 표현하고 있다. 이 두절(그리고 히1:1-14)에서는 태초에 하나님의 창조 역사의 대행자였던 자로서의 그리스도의 위치가 강조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러한 면들을 증언함에 있어 신약이그의 선재성을 증언해야만 한다는 것은 불가피한 것이다. 그는 태초에 계셨다(요1:1-3;히1:2-10). 그가 이 세상에 오신 것은(눅12:49;막1:24;2:17) 창세부터(계 13:8) 그에 대해 정해진 계획을 성취함에  있어 그의 깊은 겸손을 나타낸다(고후8:9;빌2:5-7). 그는 요한복음에서 그 자신의 말로 자신의 선재성을 증언한다.(요8:58;17:5,24)
    
그러나 아버지로부터의 그의 오심은 그의 신성의  어떠한 감소도 내포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와 아들간에 존속하는 사랑과 동등의 관계에는 아버지에 대한 성육신 아들의 종속 관계가 존재한다. 왜냐하면 보내는 분은 아버지시지만 보냄을 받는 분은 아들이시며(요10:36), 주는 분은 아버지시지만 받는 분은 아들이시며(요5:26), 정하는 분은 아버지시지만 성취하는 분은 역시 아들이기 때문이다(요10:18).
  
그리스도는 머리이신 아버지께 속하며(고전3:23;11:13) 결국 아버지께서 만물을 그에게 복종케 하실 것이다.(고전1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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