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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부들의 기독론

by 소소한행복^^ 2023. 1.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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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시대 직후의 시기에 사도를 계승한 교부들(A.D.90-140)은 그리스도를 높이 평가할 수 있었다. 다음과 같은 말로 시작되는 설교가 있다. "형제들이여, 우리가 하나님을 산 자와 죽은 자의 심판자로 생각하듯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도 그렇게 생각 해야만 합니다". 이그나티우스는 그리스도의 참된 신성과 인성을 강조함과 동시에 하나님의 피에 대해 언급할 수 있었다. 비록 그들의 증언이 이그나티우스의 것에 미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그리스도를 성령께서 세례시에 임한 자연적으로 태어난 인간으로 보았던 에비온파와, 그리스도의 인성과 고난은 실제적이라기보다는 명백하였다고 주장했던 도케데파와 싸울 진정한 시도를 나타내 보였다.
    
다음 세대의 변증자들(예, 100-165년 경우 저스틴과 안디옥의 데오빌로)은 복음을 교육받은 자들에게 위탁하여 그것을 이교도들과 유대인들의 공격에 맞서 방어하게 하려 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위치에 대한 그들의 개념은 복음에 주어진 역사적 계시에 의해서보다는 로고스에 대한 당시에 유행하던 철학적인 개념에 의해 결정되었으며 그들에게 있어 기독교는 새로운 율법이나 철학이 되고 그리스도는 가장 높은 하나님보다 열등한 다른 하나님이 되려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당시 사디스(Sardis)의 멜리토(Melito)는 그리스도에 대해 명백히 하나님인 동시에 인간이라고 말했으며 이레니우스(140-200년경)는 영지주의의 도전에 맞섬으로써 그는 그리스도에 대해 더욱 성경적인 견해에로 돌아왔었다. 곧 그는 그리스도의 위격(位格)을 그의 구속사역 및 계시와 밀접하게 관련시켜서 보았다. 그에게 있어 그리스도는 그의 그러한 사역과 계시의 성취 중, "우리를 바로 그 자신과 같이 되도록 하기 위해 우리와 같이 되셨다." 따라서 그는 인류의 새로운 머리가 되셨으며 우리를  '총괄갱신'(總括更新:모든 것을 다시 새롭게 함)의 과정을 통하여 구원하심으로써 아담으로 인하여 잃어진 것을 회복하셨다. 그는 자신을 우리와 동일시함에 있어 참 하나님이자 참 인간이시다. 터툴리안(160-220년경)도 영지주의 및 아버지(성부) 외에 제2의 하나님으로서의 그리스도에 대한 명백한 예배를 온갖 방법으로  반대했던 군국주의로 알려지게 되었던 여러 주의(급진적 혁명주의, 삼위 양식설, 사벧리우스주의-양태론(樣態論)과 싸움으로서 기독론에 공헌하였다. 그는 아버지(성부)와 아들(성자)은 '한 본체'라고 가르칠 뿐 아니라 하나님 안의 세 위에 대해 말한 최초의 사람이 되었다.
    
오리겐(185-254년)은 동방에서 기독론의 발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는 아버지(성부)로부터의 아들(성자)의 영원한 발생을 가르쳤으며 최초로  호모우시오스(동일본질(同一本質)란 말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그의 난해한 교의는 그리스도를 전적으로 초월적인 하나님의 존재와 창조된 이 세상간의 간격에 다리를 놓는 중개적인 존재로 보는 견해를 내포하였다. 그후 318년경에 시작된 아리안 논쟁에 있어서의 두 견해도 오리겐에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영향력을 보였다.
    
아리우스(265-336년 경)는 어떠한 신적 발산의 가능성이나 이 세상과의 접촉, 혹은 하나님 내의 어떤 구별의 가능성도 부인하였다.
  
그러므로 그 말씀(the Word)은 시간전에 무에서 창조되었다. 비록 그를 하나님이라 부를 수도 있다 하더라도 그가 바로 하나님은 아니다. 아리우스는 그리스도에 대해 인간의 영혼을 부인하였다. 325년 니케아회의는, 아들(성자)는 단지 "모든 창조물 중 가장 먼저 나신 자"가 아니라 그는 참으로 "아버지와  한  본체"라고 주장함으로써 아리우스를  정죄하였다.  아다나시우스(298-373)는 아리우스주의와의 오랜 싸움을 통하여 로고스의 성격에 대한 철학적인 교의가 아니라, 육신을 입으신 말씀에 의해 성취된 구속의 성격에 자신의 논증의 근거를 둠으로써 아버지와 아들의 본체적 단일성을 확인하려고 하였다. 오직  하나님 자신이 인간의 육신을 취하시고 죽으시며 인간의 몸으로 부활하여 하나님 자신의 속성을 나누는 데서 존재하는 구속을 성취할 수 있다.
    
니케아 회의 후 다음고 같은 의문이 제기되었다. "만일 예수 그리스도가 참으로하나님이라면 어떻게 그가 동시에참 인간일 수 있는가?"
  
아폴리나리스(310-90)는 예수가 완전한 인성을 취하셨다는 것을 부인함으로써 신인(神人)의 위(位)의 단일성을 옹호하려고 하였다. 그는 인간이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요소로 구성되었다고 가정하였다. 몸, 비이성적인 영 혹은 이지가 그것이다. 예수에게 있어 인간의 이지는 신적 로고스로 대치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그리스도의 인성과 그의 성육신 및 구원의 진정성을 부인한 것이 된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에 대한 가장 유력한 반대는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에 의해 다음과 같이 표현되었다. "가정되지 않은 것은 치료되지  않은  것이다."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이신 동시에참 인간이셔야만 한다. 아폴리나리스는 381년 콘스탄티노플에서 정되되었다.

그러면 하나님과 인간이 어떻게 한 위(位) 안에 연합될 수 있는가? 논쟁의 논점은 콘스탄티노플의 감독 네스토리우스(451)에게 집중되었는데 그는 마리아게게 적용되었던 '하나님의 어머니'란 말을 사용하는 것에 대해 인정하기를 거부하였으며 또한 그는 마리아에 대해 하나님을 낳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관이었던 인간'을 낳았다고 주장하였다. 네스토리우스가 신인(神人)이 한  위(位)였다고 명백하게 주장했던 사실에도 불구하고 그는 신성과 인성에 대해 그 양성은 병존해있으면서도 서로 너무나 날카롭게 구별되어 있기 때문에 인성의 고난을 신성에 까지 관련시킬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양성간의 이러한 구별은 정죄되었으며 무감각한 말씀이 죽임을 당했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그리스도에게 있어 양성의 완전한 단일성을 재단언함에 있어 주로 씨릴(Cytil)의 영향력에 의해 네스토리우스는 에베소회의(431)에서 파면당하게 되었다. 씨릴은 그리스도의 인성이 전면적으로 완전하지만 독립적인 실제는 아니라고 주장함으로써 아폴리나리스주의를 회피하려고 하였다. 씨릴의 추종자 중 한 사람인 유티커스(Eutyches)에 대해 논쟁이 야기되었는데 그는 육신을 입은 그리스도 내의 양성은 하나로 합체되어 있었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한 가현설적인 견해를 의미하였으며 그리스도의 인성은 우리 인간의 것과 다르다는 것을 뜻한 것이었다. 결국 유티크스주의와 네스토리우스주의는  다음과 같이 가르쳤던 칼케돈 회의(451)에서 정죄되었다. 한 그리스도는 양성을 갖고 있었는데 그 양성은 한 위 혹은 한 실제로 연합되어 있으면서도 그 양성간에는 '혼란이 없고 변질이 없으며, 분열이 없고 구별이 없었다.'
    
그리스도에게 있어 인성이 실로 자체의 완전한 인간성을 존속시키면서 어떻게 독립적으로 실재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에 관해 교회가 결정을 내리기도 전에 또 다른 논쟁들이 일어나야만 했다. 대다수인들이 칼케돈 신조의 해석을 인정할 수 있게 했던 신조를 발전시킨 자는 비잔티움의 레온티우스(Leontius)였다. 그는 그리스도의 인성이 독립적인 실재가 아니었지만 그것은 그대로 현존하였다고, 곧 그것은 로고스 안에서 로고스를 통하여 자체를 가대로 존속시켰다고 가르쳤다.
    
양성은 그리스도가 두 의지 혹은 두 의지력을 가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지 어떤지에 관한 또 한 차례의 논쟁이 일어났었다. 이때 그 신인(神人)은 비록 양성으로 있으면서도 한 신인의 힘에 의해 역사했다고 주장했던 Monothelites의 마음에 들도록 하기 위한 신조가 처음으로 작성되었다. 그러나 결국 그리스도 안에는 '한 의지'가 있다고 주장하는 신조를 로마의 감독 호노리우스(Honorius)의 편애에도 불구하고 649년 서방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는 '자연스러운 두 의지'가 있다고 포고하였으며 이 포고가 교황 호노리우스 1세의 견해가 이단으로 정죄되었던 680년 콘스탄티노플에서의 제 6차 에큐메니칼 회의에서 전(全) 교회의 결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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