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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론의 발전

by 소소한행복^^ 2023. 1.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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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신학자들은 교부들의 기독론의 권위를 받아들였으며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에 있어서의 참된 인성, 겸손을 통한 우리의 본보기로서의 그의 중요성 및 그의 신비로운 경험에 대한 어거스틴(354-430)의 강조에 의해 자신들의 사상과 경험을 풍성하게 하였다. 그러나 오직 그리스도가 인간과 멀리 떨어져 계시고 두려운 하나님간을 중재하는 자로서 수난을 통하여 바쳐졌다는 데서만 그의 인성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리스도의 위에 대한 그들의 더욱 관념적인 논증에는 그리스도를 우리 인간의 진정한 인성을 거의 갖고 있지 않은 자로 나타내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예수의 인성은 신랑되신 예수와 인간 영혼의 연합을 강조했던 클레보(Clairvaux)의 성 베르나드(1091-1153)에 있어 신비스러운 헌신의 초점이 되었다.
    
종교개혁시 루터의 기독론은 불가분리의 연합 관계에 있는 참 하나님과 참 인간으로서의 그리스도에 근거되어 있었다. 그는 인간성과 그리스도의 연합을 통해 그의 의가 우리의 것이 되고 우리의 죄가 그의 것이 되는 '놀라운 교체'에 대해 말하였다. 그는 예수라는 역사적인 인물로부터, 혹은 그가 수행하기 위해 오신 일이나 우리의 구속을 성취하기 위해 오신 직무로부터 분리된 신인(神人)에 대한 사색에  이를지도 모를 어떠한 생각도 묵인하기를 거부하였다. 그러나 루터는 '속성들의 교통'에 대한 교의가 그리스도 안에서 신성과 인성간에 특성이나 속성들의 상호 교류가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것은 칼케돈 기독론이 횝피한 양성의 혼합설에 가까운 신성과 인성의 상호  침투를 의미하는 데까지 발전하였다고 가르쳤다. 후에 속성들의 교통은 루터주의 정통파에서 하나님의 아들의 인성이 하나님의 위엄스러운 속성들을 얼마나 공유하고 경험하며, 그것이 얼마나 오래 그렇게 할 수 있었고, 예수께서 그의 인간 생애 중 그러한 속성들을 얼마나 사용했는가, 혹은 얼마나 포기했는가에 대한 논쟁에 이르렀다.
    
칼빈도 교회 회의들 중 정통파 신학설을 승인하였다. 그는 말씀이 육신을 입었을 때 그는 우주를 유지시키는 그의 정규적인 기능을 중단하거나 변경하지 않았다고 가르쳤다. 칼빈은 루터파 기독론에 있어서의 유티커스 이론(異論)에 대한 경향의 범죄성을 극단적으로 진술하였으며, 그리스도 안의 양성은 결코 불리되지 않으면서도 양자가 각각 명백하게 존재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 내의 위의 연합에 있어 하나의 성은 다른 성에 관계되는 역사와 사건들에 너무나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인성은 마치 신성을 취한 것처럼 보였다. 구원이란(인성을 통해서 역사한) 그의 신성에 의해서 성취되었을 뿐만 아니라 참으로 인간 예수에 의해서 성취되었다. 이 예수는 모든 사람을 위해서 완전한 복종과 성화를 이루셨다(인간으로서의 예수님은 구원을 이루기 위한 도구일 뿐만 아니라 구언의 원인이시다). 이러한 구원은 선지직, 제사직, 왕직이라는 3중직(三重職)의 성취를 통해서 실현되었다.
    
여기서 루터파의 가르침과 개혁파의 가르침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즉, 루터파는 두 본서의 연합을 강조하되 인성이 신성에 연합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개혁파 신학자들은 그러한 주장을 반대하고 성자(聖子)의신적인 인격 속에 인성이 받아짐으로 인해 신성과 인성이 직접적으로 연합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리하여 개혁파 신학자들은 교부들의 communicatio idiomatum의 개념을 유지하면서 또한 cummunicatio operationum의 개념을 발전시켰다(즉 신성과 인성의 여러 가지 속성들이 연합하여 한 인격을 이루었다는 것). 이것은 두 본성이 상호 침투작용한다는 주장을 배격하고 이 두 본성의 능동적인 연합을 주장하기 위한 것이다.
  
개혁파 신학자들이 communicatio operationum의 학설을 주장한 중요한 이유는-이주장은 나중에 루터파의 주장 되었음- 교부들이 주장한 두 본성의 정적(靜的)인 연합을 시정하기 위한 것이었다. 즉  개혁파 신학자들은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은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다고 보고, 그리스도께서 속죄와 화목의 사역을 이루시는 데 있어서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은 서로 동적(動的)인 연합을 이루었다고 주장했다. 다시 말해서 개혁파 신학자들이 주장한 이 연합의 교리는 그리스도의 두 본성이 그의 중보(仲保)의 사역을 위해서 연합되었다는 것이다.
  
이 중보 사역은 신인(神人)의 한 인격으로부터 이루어졌으며 이 두 본성은 확실한 효력을 발휘했다. 이렇게 볼 때에 본질적 연합(hypostatic union)이란 화목이라는 동적인 행동을 존재론적 측면에서 설명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성육신과 속죄의 교리는 본질적으로 이것을 보충하는 것이 된다.
    
19세기 초엽부터 두 본성에 대한 칼케돈 신조의 교리를 떠나는 경향이 생겼는데 이것은 그러한 교리가 복음서에 묘사된 예수님께 대한 표현과 거리가 멀고 또한 그러한 용어들은 신구약 성경에서도 없는 생소한 것들이며 그리스도 당시의 표현 방식도 아니라는 이유에서였다. 그리하여 슐라이에르마허(Schleiermacher)는, 그리스도께서는 성부(聖父)의 아들이라는(독특하고 원형적인) 의식을 가지고 성부를 전적으로 의지했다는 관점에서 기독론을 전개하고 있다. 그런데 루터파는 이상과 같은 기독론을 좀더 발전시켜서 예수님의 신적인 속성들은 그의 인간적인 속성들로 인해 제한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이와 같은 주장은 토마시우스(Thomasius)의 겸허설(Kenotic Theory:빌1:7 참조=역자주)에 따른 것이다.

빌 1:7/ 내가 너희 무리를 위하여 이와 같이 생각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너희가 내 마음에 있음이며 나의 매임과 복음을 변명함과 확정함에 너희가 다 나와 함께 은혜에 참예한 자가 됨이라


이 견해에 대해서 좀더 부언하자면, 말씀은  성육신함으로써 전지, 전능, 편재 등의 외적인 신성들을 빼앗기게 되었지만 아직도 본질적인 도덕적 신성들은 그대로 간직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즉, 그는 물론 성육신한 이후에도 언제나 하나님으로 존재하시지만 하나님의 모습(형태:form)으로는 존재하지  않으셨다는것이다. 뿐만 아니라 성육신하신 그리스도에게 있어서는 심지어는 자신이 하나님이시라는 의식조차도(점점 각성되어지고 증가되는) 신인(神人)이라는 오직 한 가지 의식속에 흡수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리츨(Ritschl)도 역시 그리스도의  윤리적인  속성을 강조했다. 그리고 그는 성경에 역사적인 예수께 대해 기록된 것 이상으로 쓸데없이 상상하는 것을 거부하고, 에수님은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으로서의 가치를 가지고 계셨으며 그의 완전한 도덕적 성품에는 신성과 인성이 모두 들어 있었다고 주장했다. 그  후 20세기에 접어들어서부터는 인격에 대한 현대적 개념과 진화론이라는 과학적이고 철학적인 이론으로 인하여 19세기의 기독론은 아주 다양한 이론들로 확대되었다.
    
보다 더 최근에는 다시금 두 본성에 대한 칼케돈 신조에로 돌아가자는 신학적 논의가 계속되고 있다. 이것은 개혁주의적 전통이라는 역설적인 운동인데 예수님의 두 본성 안에 있는 은혜와 신인의 사역 간의 신비적인 관계를 밝히자는 것이다. 이러한 신비적 관계는 속죄와 별개의 것으로 생각되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이러한 신비적 관계(비밀)는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가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의 모든 사역을 통해서 역사적으로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성도들(교회)도 그리시도께서 신인의 새로운(비밀스런) 존재가 되신 것처럼 성령님을 통해서 그러한 비밀(신비)에 참여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기독론이 교회론과 성례관에 대해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참으로 우리는 기독론을 통해서 제반 신학적인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지침을 찾아야 할 것이다. 또한 우리는 기독론 속에서 인간의 문제들과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헤와의 관련성을 다루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 모든 신학 체계들은 이러한 기독론적 양식 속에서 그 일관성과 통일성을 발견해야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이러한 신비(비밀)를(이스라엘인의 생활을 배경으로 한)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의 인격으로부터 추출하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역사적인 인간 예수의 생애와 교훈은 그의 구원 사역에서 완전히 발견되어져야 한다. 그러한 구원 사역은 죄인을 속죄하고 하나님과 화목케 하는 데 있어서 결코 부수적인 것이거나 도구에 불과한 것이 아니고 본빌적인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오늘날의 성경 연구에 큰 비중을 두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이 성경 연구를 통하여 예수님이 어떠한 분이셨음을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러한 역사적인 예수가 믿음의 주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깨닫게 될 것이다. 또한 우리는 예수님의 직분과 사역을 연구함으로써 예수님은 한 개인일 뿐 만아니라 인류를 대표하는 분이심을 깨닫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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