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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서의 환대와 대접

by 소소한행복^^ 2023. 2.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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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단어의 부분적인 성경상의 용법은 단순히 낯선 사람에 대한 교훈적인 동방의 관대함을 나타낸다. 아브라함(창18장)과 롯(창19장)은 먼 옛날의 표본이 된다. 낯선 사람(뜻밖의 여행자뿐 아니라 이스라엘에 속하지 않은 지역의 사람까지도)을 위해 특별히 준비하는 풍습이 있었다. 낯선 사람들은 히브리인들과 동등한 대우를 받았는데, 그것은 그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었으며 이스라엘이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던 경험이 있는 까닭이다(신10:18,19). 모든 정성을 다하여 낯선 자를 대접했으며(레 19:33,34), 대접하는 것은 하나의 의무로 되어 있었다(삼상25:8). 아낌없이, 그리고 온전히 대접하는 것은 대접하는 사람이 선하다는 신망을 돈독히 해 주는 것이었다(욥 31:31,32). 가끔 낯선 자를 보호할 때에 다른 사람이 방해를 한다면, 이것은 원한이나 징벌의 행동이 되었다.(삿19,20장)

이러한 역사적 배경과 조화를 이루어, 예수는 그의 제자들에게 특별한 준비없이 가라고 명령하셨는데, 그러한 방법에 따라 환대 받는것을 기대한 것이다(막6:7-13). 좋은 소식(복음)을 전달하고 병든 자를 고치는 자로서 제자들은 친절한 대접을 받을만한 충분한 이유가 더 많았다. 이러한 선례는 의심할 여지없이 초대 교회의 모본이 되었기에 교회는 전도 사역의 확장면이나 교회의 순회 전도자를 환대하는 면에서 '대접'하는 일에 의존하였다(행 9:43-11:18;16:15;롬16:23;딛3;13). 온 가족이 믿게 되는 회심의 경우, 하나님의 종을 집으로 불러 영접하는 것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왜냐하면 처음 2 세기 동안은 가정 내의 교회를 규범화했었기 때문에 각 지교회에서는 '대접'하는 일을 멀리하고는 구실을 다할 수 없었다. 나그네를 사랑하라는 구약의 명령은 교회의 생활 속에 깊숙이 침투되어 의무라기보다는 사랑의 '대접'으로서 강조되었다(히 13:1,2;롬12:13). 여기서 사용된 단어는 필록세니아(φιλονεξία)이다.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히 13:1,2)

교회의 감독은 이러한 면에 있어서 자격을 갖추어야 하는 것이 자격 중 한 가지였다(딤전3:2;딛1:8). 이러한 규준에서 발생되는 다양한 면들은 색다른 상황을 나타낸다. 바울이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을 방문했던 때에 그를 대접했던 일은 바울과 그의 일행을 위해 미리 준비한 배려가 엿보이는 듯하다. 지교회의 지도자들은 이러한 책임을 유감없이 수행하였다(행21:16). 높은 지위에 있던 디오드레베가 한 교회의 '으뜸'으로서 대접하지 않았던 일은 한 가지 예로서 적절히 형제들에게 충고되고 있다.(요삼10절)
    
베드로전서 4:9의 명령은 대접하는 일이 암암리에 자칫 무거운 짐이 될 수 있으나 그것을 원망없이 행하라고 암시해 준다. 2세기에 있어서 교회는 그리스도인의 아량을 이용하여 대가 없이 제공하는 기회를 노리는 사람들로부터 참된 주님의 종들을 구별해 내기 위해 어떤 심사(test)를 규정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교회는 이러한 어려움을 극복하였고 여러 유형들의 나그네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일을 특별히 계속하였다.
    
크리스찬 주교들은 자선 시설을 세우는 지침을 만들었고(4세기부터), 반면에 후기 수도사들은 수도원과 관련지어 여행자들을 위한 안식처로 숙박소를 발전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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