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카비우스'는 유대의 영웅 유다 벤 마타니아스(Judas ben Mattathias)의 별명의 헬라어형에서 유래하였는데(마카비1서 2:4), 이는 '망치로 금속 등을 두드려서 만드는 자'를 의미하는 듯하다. 랍비 문헌에서 그의 가족은 하스몬가(家)로 불리고 있다. 알렉산드리아의 헬라 제국 분열 이후에, 시리아 진영(셀레우쿠스 왕가)과 이집트 진영(톨레미 왕가) 사이의 갈등으로 말미암아 셀레우쿠스 왕 안티오쿠스 4세(에피파네스)가 개입하게 되었다. 그는 유대의 대제사장직을 경매에 부쳐 최고의 입찰자인 메넬라우스에게 팔았으며, BC 168년에는 예루살렘을 공격하여 강한 종교적인 박해를 가하기 시작했고, 성전에 상을 세우고 제사를 드렸다. 많은 유대인들(특히 하시딤, 즉 '언약의 사람들')은 영웅적인 고난을 당했다(마키비1서 1:60이하;2:29이하). 예루살렘에서 30km 떨어진 모데인에서, 나이 많은 마타티아스는 왕의 제단에서 제사 드리기 위해 왔던 한 유대인과 수리아군 감독관을 살해했으며, 율법을 사랑하여 그를 따르는 모든 사람과 다섯 아들을 산에 소집하였다. 이렇게 하여 마카비 반란이 시작되었다.
마타티아스의 셋째 아들인 유다 마카비우스는 게릴라군을 이끌고 숫적으로 월등히 많은 수리아군에 대항하여 승리하였으며, 그 결과 안티오쿠스의 섭정인 리키아스(Lycias)는 그와 평화조약을 맺게 되었다. 성전은 BC164년에 거룩하게 정화되었으며, 훗날에 하누카, 곧 수전절이 거행되었다(마카비1서 4장;참고. 요 10:22). 이로 인해 몇몇 도시들에서는 유대인 소수 무리들에 대한 박해가 있었으며, 마카비 일가는 이를 진압하고자 했다. 유다는 BC 161년에 전투에서 살해당했으며, 그의 아우 요나단이 산위로 쫓겨난 게릴라들을 통솔하게 되었다. 그는 유대의 유능한 지도자가 되었다. BC 153년에 대제사장으로, BC 150년에는 시 통치자로 임명되었으나 BC 143년에 살해당했다. 마타티아스의 아들 가운데 막내로서 대제사장이자 시 통치자였던 시몬에 의해 유대는 사실상 독립하였다. 그의 아들이자 계승자인 요한 히르카누스가 죽었던 BC 104년 당시에 유대는 솔로몬 이후 그 절정에 달했다. 이어서 BC 1세기에는 내부의 음모로 인해 로마의 개입을 받게 되었다.
요나단이 대제사장이 되고, 바리새인들(나중에 하시딤의 계승자들)이 하스몬가(家)의 제사장 왕들(priest-kings)로부터 전적으로 소외당하게 되었을 때 마카비 일가와 하시딤 사이에 불화가 생기게 되었다. 그러나 마카비 일가는 유대 민족주의와 신약 시대의 메시아 사상에 대한 형태를 정해 주었다.
열심당원들은 종종 마카비의 이상(理想)과 연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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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카비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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